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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등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필립 K. 딕(2)
2002-07-19

도매가로 미래세계를 팝니다

report3 ┃SF로 간 문학도

3. 필립 K. 딕은 아서 C.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하드’한 작가는 아니었다. 클라크와 같은 작가들에게 SF세계는 과학적 상상력과 연역 과정을 통해 예측한 ‘가능성 있는’ 미래였다. 하지만 딕에게 SF는 이미 그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기술하는 조금 독특한 도구였다. 그는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과학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미래의 기술을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성인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이미 존재하는 SF 장르의 클리셰들을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이용했다.

골수 SF팬에서 시작한 엔지니어/과학자 출신의 클라크나 아시모프와는 달리 그는 순문학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가 SF로 시선을 돌린 건, 그것이 그의 미치광이 비전을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그의 VALIS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주의 진리와 기존 종교에 대한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 정신나간 소설은 어설프게나마 SF 모양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연역 과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SF의 장르와는 큰 관계가 없다. 이건 그냥 정신나간 사람이 자기 세계에 대해 쓴 보통 소설인 것이다.

그는 이 장르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신병 환자들이나 약물중독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을 많이 썼다(A Scanner Darkly, VALIS…). 그의 비교적 멀쩡한 캐릭터들도, 밖의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인’은 절대로 아니다. 필립 K. 딕의 성공적인 소설들은 대부분 광기와 중독의 기술이다.

report4 ┃리얼리티를 비웃음, 세상에 완벽은 없다

4. 필립 K. 딕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리얼리티의 허약함’이었다. 그는 버클리식 연역적 추론 과정이 아닌 실제 경험을 통해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쉽게 기만당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주제를 가장 명백하게 다룬 작품은 그의 비교적 초기 작품인 <Time Out of Joint>다. 이 소설의 무대는 ‘완벽한’ 1950년대식 미국의 교외 주택지다. 이 세계는 너무나도 완벽해서, 주인공은 서서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완벽한 안락함을 의심하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50년대식 편집증에 빠지고 마치 <뷰티풀 마인드>의 수학교수처럼 주변 세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 연결하려 시도한다. 단지 이 경우, 그의 편집증은 상당히 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세계는 정말로 <트루먼 쇼>식 가상세계이고 실제 세계는 달을 둘러싼 전쟁이 한창인 1998년의 ‘미래’다.

<Flow My Tears My Policeman Said>의 설정 역시 리얼리티의 허약함을 폭로하면서 시작된다. 가수 겸 텔레비전 스타인 주인공은 어느 날 그의 존재가 완벽하게 말살된 세계에서 깨어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에서 순식간에 무명의 존재로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네오 파시스트들이 지배하는 경찰국가가 된 가상의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 이어지지만, 진짜로 중요한 건 주인공 태버너가 겪는 두 세계의 균열이 아닌가 싶다.

딕이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에서 사용한 대체 역사소설의 도구도 연역 과정을 통해 역사의 다른 경로를 추측해내는 원래의 목적에서 살짝 어긋난다. 그가 만들어낸,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래는 필립 K. 딕의 환각에 가깝다. 딕의 세계가 대부분 그렇듯, 리얼리티와 환각은 종종 엉뚱한 곳에서 연결된다. 이 소설에서 그 연결도구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가상의 현재’를 다룬 지하소설 <The Grasshopper Lies Heavy>다(재미있는 건 바로 <The Man in the High Castle>이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현재를 다룬 킹즐리 에이미스의 소설 <The Alternation>에서 존재하지 않은 현재를 다룬 SF소설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에이미스 소설에서 리얼리티와 환각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에이미스의 소설에 언급되는 평행 우주의 필립 K. 딕은 너무나도 필립 K. 딕다운 존재다).

픽션과 미래의 현실이 연결되는 유쾌한 사례는 단편 <물거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단편에서 그와 그의 SF 작가 동료들이 쓴 모든 소설들은 미래에 실현되고 그들은 예지자로 취급받는다. 그보다 더 소박한 세계의 창조 방식은 역시 단편인 <퍼키 팻의 전성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남아도는 화성인들의 구호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생존자들은 50년대 미국을 재현한 인형놀이에서 유일한 위안을 찾는다.

소설 vs 영화

┃토탈 리콜┃1990년, 감독 폴 버호벤 , 출연 아놀드 슈워제네거, 샤론 스톤

<도매가로 추억을 팝니다>를 각색한 <토탈 리콜>은 딕의 원작을 화성을 무대로 한 폴 버호벤/아놀드

슈워제네거식의 폭력액션을 영화에 끌어올 핑계로 사용했다. 원작의 핵심이었던 정신없는 아이덴티티의 교체와 리얼리티의 혼란은 모든

정체가 밝혀지는 영화 중반부터 명명백백한 현실로 대체된다. 그렇다고 새로 추가된 부분에 딕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데,

과거의 사악한 주인공과 나중에 음모를 위해 새로운 주인공의 인격이 시간차를 두고 대립하는 설정은 상당히 그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대의 화성인 유적을 배경으로 한 화성의 묘사 역시 딕의 세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딕의 주인공답지 않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주인공 퀘일 역에는 오히려 우디 앨런과 같은 왜소한 배우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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