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판타지로 그려낸 소녀의 성장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1)
2002-07-25

오!황홀한 활력이여

그것은 잃어버린 부모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진 어느 효녀의 고행담이다. 뜻하지 않게 그 여름 밤 신들의 놀이동산을 엿보게 된 소녀의 비밀 일기다. 탈출구를 모르는 수수께끼의 세계에 갇힌 앨리스의 새로운 악몽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가뭄 동안 꼭꼭 문을 걸어두었던 미야자키의 뒷마당에 아직도 넘쳐나는 우물이 있음을 폭로한 기쁨의 고자질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 소녀가 물 위로 떠내려보낼 뻔했던 어떤 이름에 대한 이야기다.

그 옛날 아드리아 해변에서 만났던 <붉은 돼지>는 말했다. ‘날지 않는 돼지는 단지 돼지일 뿐’이라고. 그런데 오늘 나는 ‘오직 먹기만 하는 인간들 역시 단지 돼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별다른 악의도 없는 부모를 돼지우리에 처넣어버리고 시작하는 이 영화는, 10살짜리 소녀에게 무기력한 어른들을 ‘일단 포기’하라고 가르친다. 뙤약볕을 뚫고 주말의 극장을 찾은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극장 입구의 놀이방에 들어가 있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재빨리 돼지 어른의 옷을 벗고 그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물이 차오른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토토로의 숲에서 치히로의 물로

<이웃의 토토로>를 지배했던 것이 사실상 숲과 바람이었다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물이다. 소녀 치히로의 등 뒤로 물이 차오르고, 그 물은 깊고도 넓은 바다가 된다. 방금 전까지 이사가는 일에 찡찡대며 부모의 차에 실려가던 소녀의 나약한 세계는 물에 떠밀려갔다. 이제부터 그녀는 필사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돼지가 된 부모를 돌려받아야 하고, 이승으로 돌아갈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무한의 수평으로 뻗어 있는 바다밖에 없었다면, 그녀는 쉽게 포기했을 것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도 금세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하얀 미소년 하쿠를 만나고, 수평의 물 위로 요동치는 수직의 물을 보게 된다. 기껏해야 10층도 되지 않는 단아한 온천장은 저 넓은 바다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래도 아래위로 꿈틀거리는 그 물이 그녀에게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이라도 칠 희망을 준다.

물을 움직이는 요동의 힘을 찾아 온천장의 밑바닥으로 간 그녀는 보일러실에서 쉴새없이 일하는 가마 할아범을 만나 무릎을 꿇는다. 신기할 정도로 그녀는 단호하고, 그때부터 영화의 끝까지 두려워는 하되 절대 갈등하지는 않는다. 돼지처럼 먹어대는 부모 뒤에서 옷자락을 잡고 짜증을 내던 소녀가 절대 아니고, 숨을 참고 다리를 건너다 개구리에게 들킬 위기에서 소년의 팔을 꼭 잡고 놀라던 소녀 역시 아니다. 놀라울 정도로 현실 인식이 빠르면서도 철저하게 자기 주관을 지켜나가는 소녀다.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하루 18시간씩 착취를 당하더라도 묵묵히 일을 할,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녀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불완전한 한 인격의 성장과 완성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밑바닥에 완성되어 있던 인격이 외부의 충격으로 서서히 바깥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돼지가 아닌 어른이 되는 어떤 방법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미션! 부모를 구하고 이름을 되찾을 것

바닥에서 해답을 얻지 못한 소녀는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리고 온천장을 지배하는 마녀 유바바와 계약을 맺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계약은 열쇠다. 유바바는 치히로(千尋)를 취업시키는 대신, 그녀의 이름 한자를 줄이고 센(千)이라 부른다. 이제 센은 온천장의 혹사를 견뎌내며 부모를 구해낼 방법을 알아내야 하고, 언젠가 자신을 되돌릴 열쇠인 이름도 되찾아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열쇠가 존재했다는 사실, 문제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온천장은 온갖 신들이 먹고 노니는 물의 놀이터다. 저녁 무렵이 되면 사방에서 신들이 줄을 지어 찾아온다. 커다란 병아리처럼 생긴 새의 신, 토토로의 친척뻘로 보이는 무의 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신성황제를 떠올리게 하는 귀신 등 그들은 모두 물 밖에서 온 존재들이다. 그들을 맞이하는 종업원들 중에는 폴짝거리는 개구리 그대로의 모습도 나오지만,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는 것들조차 커다란 입의 메기나 두꺼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물의 종족이고, 금부스러기를 몰래 숨기는 얄팍한 욕망을 지니고 있어도 결국은 물과 일체가 되어 있는 존재다(그래도 약간의 자각이 있는 센의 선배 린은 여우의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갖가지 탕약이 뒤섞인 온천수가 솟고 때리고, 맛난 술과 생선이 뒤엉켜 신들의 몸과 마음을 풀어준다. 일본식의 흥겨운 잔치를 멋들어지게 그려낸 이 장면들은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 폼포쿠>에 나오는 ‘백귀야행’의 거리 축제를 능가하는 즐거움을 준다. 서극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천녀유혼>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보여준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