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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채성의 <취중진담>
2002-07-25

취할 듯 말 듯,거기까지!

아주 상식적이게도 만화는 드로잉, 연출, 이야기로 구성된다. 만화는 이 세 가지 요소의 균형을 통해 완성도를 올린다. 삼각뿔의 완벽한 황금분할처럼, 만화(만화가)는 정점에 이르기 위해 노력한다. 자칫 어느 하나라도 부실하면 만화는 급속히 균형을 잃고 방황하기 때문이다. 대가의 작품에서는 완성된 삼각뿔의 균형감이 느껴지지만, 신인 만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불안하다.

<취중진담>의 송채성은 자기복제가 만연한 신인들의 만화와 다른 역동성을 보여준다. 만화의 화면과 칸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은 삼각뿔의 세면을 꼭지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작가의 노력이 작품에 녹아들고, 그 노력이 독자들에게 읽히는 일은 작가와 독자의 행복한 커뮤니케이션이다. 2년 전인 2000년, <나인>에 발표했던 단편들에서 시작된 그의 만화는 같은 제목의 연작으로 그려진 새로운 원고로 제작된 단행본으로 이어지며 역경을 정면돌파한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연재 원고료 수입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연재와 동일한 수준으로 만화를 그려내 단행본을 출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취중진담> 2, 3권은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다.

술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다

<취중진담> 연작은 ‘술’을 매개로한 사람의 이야기다. 잡지에 연재된 단행본 1권은 술과 술을 마시는 자리, 술에

취한 사람이라는 세 아이템으로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다. 다른 만화에서 보이는 화려함도, 팬시함도, 섹시함도 없이 어제 저녁에 바로 친구들과

마셨던 그 구질한 술자리처럼 존재하는 만화 속의 장면들이 친근하다. 1권의 7개 에피소드는 대부분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의

엇갈림, 술을 빌려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모습은 낯익고 친숙하다. 분명히 신파인데 도를 넘지 않는다. 넘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많은 로맨스만화들이 학원과 교배하며 자기복제를 거듭해 식상해진 반면 <취중진담>은 로맨스의 본질, 그 가슴아픈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2권에서는 이야기의 초점이 기다림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따돌림받은 내 이름을 불러준 짝에 대한 기억과 기다림이나 상대방의 슬픔과 만난 뒤 그 사람을 기다린 미용사나 모두 자기의 마음에 공명한 상대방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

이렇게 펼쳐놓고보니 <취중진담> 연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2002년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아니라 몇년 전, 몇십년 전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처럼 느껴진다. 이야기도 마찬가지. 기다림 속에 그 사람을 만나고, 단번에 알아보는 우연은 70년대 멜로영화에서 보던 우연의 반복이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주인공이나 반복되는 우연이 거슬리기보다는 반갑다. 90년대 중반부터 순정만화라는 이름이 촌스럽게 여겨지던 때 얼터너티브가 되었던 만화들에 등장한 차갑고 건조한 ‘사막의 밤’ 같은 주인공들에 비해 <취중진담>의 주인공들은 인간적이다. 하지만 때론 그 인간적인 측면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데 바로 연출에 힘이 들어갔을 때다.

조금만 더 버리기를

연출과 드로잉에서 송채성 만화의 특징은 사각앵글의 빈번한 사용과 착실한 드로잉에 기초한 꼼꼼한 배경묘사다. 데뷔작인

<전국노래자랑>을 보면, 가장 편안한 앵글인 눈높이 수평각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앙각(仰角)에 부각(俯角)이며, 사각앵글도 심심찮게

사용된다. 심지어 어느 장면은 한 화면을 세로로 길게 다섯 칸을 분할하고, 엄마와 주인공의 갈등을 머리 위에서 잡은 앵글로 보여준다.

작가는 <취중진담>의 단순한 이야기(처음을 보면 마지막을 짐작할 수 있는)의 명쾌한 의미 정보를 미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 연출에 복잡성을 강화한 것이다. 일반적인 상업만화의 연출 패턴과 드로잉 패턴을 무시하고 낯선 앵글과 드로잉을 보여주며 얻어낸 복잡성은 뻔한 이야기에 새로운 감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전국노래자랑>과 같은 극도의 복잡성은 오히려 단순해 감동을 주는 이야기의 독해를 방해한다. 독자들은 해독해야 할 정보량이 복잡한 연출로 늘어나게 되자 오히려 손쉽고 단순한 이야기에 짜증을 낸다.

그래서 작가 송채성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절제의 미학이다. 만화는 절제의 예술이다. 역설적이지만 버림의 예술이다. 수많은 정보 중에서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보만 골라내고 나머지를 버리는 기술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연출만이 아니라 드로잉에서도 마찬가지다. 송채성이 보여주는 선은 개성적이지만 산만하다. 숱한 드로잉의 흔적이 보이지만 아직 송채성만의 선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자꾸 더 좋은 선을 보여주려고 한다. 조금만 더 욕심을 버리고 절제하기를 권한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