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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O.S.T
2002-07-25

수학은 음악이고 음악은 수학이다?

미국의 신예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데뷔작인 <파이>를 지나치게 충격적으로 보기는 좀 힘들다. 이 영화의 전언은 조금 복잡하지만, ‘숫자’의 힘에 관한 결론은 나이브하고 평이하다. 자연세계의 모든 것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숫자들의 특별한 조합은 ‘신의 이름’이라는 것이 핵심인데, 이런 결론을 유도하는 사유의 방식은 서툴다 싶을 정도로 안이하다. 숫자에 관한 자연철학적인 명상을 유대교적 신비주의와 연결시키는 것도 뭐 특별한 건 없다. 그것을 증권 시스템 같은 자본주의적 ‘양화’의 시스템과 연결시키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한 천재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 또 그 천재의 내면은 숫자에 관계없이 신경증적이고 병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건 좀 그럴듯하다. 강하게 콘트라스트를 준 거친 질감의 흑백화면도 과하게 멋을 내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야심을 보여주는 정도 이상은 아니다. 6만달러의 저예산영화라는 것도 특별히 신화적이진 않다.

재미난 건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뉴욕 브루클린의 일상적 언더그라운드를 배경으로 꾸며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 재미있는 건 이 영화에 쓰인 음악이다. 테크노 음악을 쓰고 있는데, 그 선택은 사실 외길 수순이었을 것이다. 숫자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의 배경에 테크노 음악말고 다른 무슨 음악을 쓰겠는가. 자연세계에 사람이 모르는 어떤 궁극의 공식이 있는 것처럼, 음악에는 확실히 공식이 있다. 물론 똑같은 공식을 가지고도 음악은 매번 다르게 조합된다. 그러니 공식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음악은 대위법에서부터 샘플 루핑에 이르기까지, ‘공식 없이는’ 만들 수 없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자 음악가였다. 궁극의 음악가는 수학자이고 궁극의 수학자는 음악가이다. 뭐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겠다.

확실히 감독은 음악적 센스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는 테크노를 가져다가 전위적인 효과음과 심리묘사, 배경음악, 그리고 수학자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을 것 같은 이상한 규칙의 노이즈들,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있다. 클린트 맨셀(Clint Mansell)이 주도적으로 음악을 썼는데, 1963년생인 이 사람은 ‘Pop Will Eat Itself’라는 전설적인 전위적 펑크 밴드의 멤버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좀더 급진적인 전자음악과 영화음악을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파이>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 영화의 O.S.T가 저예산영화치고는 굉장히 잘 모은 테크노 베스트 앨범이라는 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음반사에서 돈을 대고 뮤지션들을 참여시킨 뒤 이익을 가져가는 방식이 아닌 다음에야 이 뮤지션들을 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비탈, 에이펙스 트윈, 데이비드 홈즈, 방코 데 가이아에, 로니 사이즈, 매시브 어택까지, 다양한 장르의 테크노를 잘 골라 영화에 쓰고 있다. 하긴 뉴욕 언더그라운드에 사는 신경증적인 수학자의 모습은 사실 실제 수학자의 것이라기보다는 테크노 뮤지션의 사는 모습과 더 흡사해 보인다. 자기 방에서 프로그램을 돌리며 이리저리 소리를 만지작거리는, 뜨기 전까지는 남루한 소리학자인 테크노 뮤지션 말이다. 이 영화가 재미난 점은 바로 그 대목이다. 카발리즘과 수학과 신경증과 자본주의를 그런 배경으로 풀고 있다는 점 말이다. 이 영화를 읽으려면 그걸 거꾸로 보면 된다. 주류로부터 격리된 자기 일탈과 추구로서의 언더그라운드. 요새 흐름의 하나다.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