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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의 뮤직비디오]에미넴의 <WITHOUT ME>
2002-07-26

세상은 엉망진창의 쇼라구

‘뮤직비디오는 당대의 다양한 문화적 요인들을 게걸스럽게 삼켜낸 블랙홀’이란 전제가 (여러분이 기억하든 못하든 간에) 이 연재의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에미넴(Eminem)의 신곡 의 비디오클립은 너무나도 명백한 그 증빙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여기 등장하는 소재/인물의 면면은 일일이 다 적시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국내에서는 동포 2세란 사실로 더 잘 알려진 조셉 칸(Joseph Kahn)이 연출한 이 비디오클립은, 다큐멘터리 필름에서부터 코믹 북까지를 제멋대로 넘나드는 형식과 포르노 스타에서부터 현직 미 국무장관에 이르는 등장인물을 한 자리에서 소화해내는, 뮤직비디오란 매체의 ‘전능한 애매함’을 과시하기 위한 쇼케이스처럼 보일 정도니까 말이다.

로고들의 변형을 통해 패러디되는 다양한 TV프로그램, 말풍선과 칸 나누기를 통해 반영된 만화책, 영화 <배트맨과 로빈>에서 차용된 장면들은 당연히, 시청자들이 이미 그것들의 외형을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결과일 터다. 포르노 스타 제나 제임슨, 미 국무장관 딕 체니,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록 밴드 림프 비즈킷, 테크노 뮤지션 모비, 그리고 ‘9·11’테러의 반영웅 오사마 빈 라덴 등 직간접적으로 이 비디오에 (대부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등장한 인물들의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와 같은 형식과 소재들은 이 비디오의 플롯이 (거의) 전적으로 에미넴의 노래말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에미넴이 뱉어낸 무수한 단어들은 세상을 엉망진창의 ‘쇼’일 뿐이라고 단정해버린 그의 삐딱한 시선을 통해 굴절되어 나온 배설물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그것들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미 데뷔 당시부터 에미넴은 일상적인 소재들의 패러디를 통해 세상을 조롱하고 있었고, 그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한 것은 비단 빌 클린턴, 마릴린 맨슨,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까지도 해당된다.

요컨대, 이 비디오클립은 이제 본인마저도 패러디 대상의 리스트에 올려놓을 정도로 대담해진 에미넴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돈벌이를 위해 흑인들의 음악을 이기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난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최악의 존재이다. 물론, 2천만명이나 되는 백인 래퍼들이 득시글거린다고 해도 내가 없으면 공허할 뿐이지만”이란 가사의 한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시피, 그건 솔직함과 뻔뻔함을 담보하고 나선 한 악명 높은 뮤지션의 대중문화에 대한 견해로서 유효한 것임에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지난 6월 말, 에미넴의 새 앨범 가 갓 발매되었을 때, 미국의 <뉴욕 포스트>가 개제했던 아주 ‘특별한’ 기사는 그래서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앨범 내용을 통해 에미넴이라는 인간의 ‘정신상태’에 접근한 여러 심리학자들의 분석 소견을 다룬 그 기사에 따르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 20대 후반의 백인 래퍼는 학대받은 아동의 전형적 현신이라는 것이다. 또, 성장기의 정신적 외상이 곧 그의 뮤즈이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과격한 그의 노래말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에미넴은 지금 이 비디오클립과 그 속에 담긴 음악을 무기로 자신이 경험해온 시궁창같은 세상을 상대로 엄청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전투의 유혈이 낭자해질수록 그의 상처는 아물어갈 테고 말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mymusic.co.kr 대표 bestles@mymusi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