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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영화10 년,충무로의 빅뱅을 돌아보다(3)
2002-07-26

좋은 기획 있으면 소개시켜줘,제발!

젊은 세대, 충무로로

<결혼 이야기> 이후 1992년 신씨네는 <미스터 맘마>를 준비하면서 기획사에서 영화제작사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1993년에는 신규 제작사가 대거 탄생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유인택 대표는 기획시대를 차렸고, <하얀전쟁>과 <그대 안의 블루>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했던 안동규 대표는 영화세상을 만들었다. 유 대표와 안 대표는 영화세상에서 제작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공동기획했고,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강우석 감독은 시네마서비스의 전신인 강우석프로덕션을 꾸려 <투캅스>를 제작한 뒤 배급에서 극장까지 아우르는 충무로의 실세가 됐다. 또 이춘연 대표는 94년 성연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 <손톱>을 제작한 뒤, 잠시 영화계를 떠났다가 96년 복귀해 유인택 대표와 함께 씨네2000을 창립해 <지독한 사랑>을 발표한다. 심재명 대표도 명필름의 전신인 홍보사 명기획을 설립해 93년 익영영화사의 <그 여자, 그 남자>를 기획한 뒤 95년 명필름을 설립해 <코르셋>을 제작했고, 차승재 대표는 싸이더스의 전신인 우노필름을 신설, <돈을 갖고 튀어라>를 만들었으며, 신씨네 터줏대감이었던 오정완 대표는 98년 나인필름에서 <정사>를 제작한 다음, 99년 영화사 봄을 차려 <반칙왕>을 만들었다.

△ 명필름의 영화들은

욕심부리지 않는 차분함과 시장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 의해 제작됐다. 하지만 트렌드에 얽매이기보다는 관객보다 반 발자국 앞서 나가며

새로운 감성의 영화를 만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섬>이나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작가주의` 계열 영화에 지지 또한

아끼지 않았다.

결국 이장호 감독의 다음과 같은 탄식도 이해가 안 가는 바가 아니다.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처럼 긴장되었다. 거의 영화인들이 아닌 듯 아는 얼굴이 별로 없었다. (중략) 내가 <명자 아끼꼬 소냐>의 영화현장을 떠난 게 고작 3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나와 함께 영화를 만들던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기습당하듯 갑작스런 세대교체라니!”(‘한국영화 회고록’, <씨네21> 263호) 결국 <결혼 이야기>는 새로운 영화를 꿈꾸던 젊은 세대들이 충무로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 셈이다.

이러한 세대교체는 한국영화의 내포와 외연을 키우는 데 큰힘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당시 외화 수입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 옛 영화사들에 맞서 한국영화 제작환경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김혜준 실장에 따르면, 김영상 정부 출범 뒤 금융실명제에 따라 지방업자들이 위축되자 충무로의 구세력은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이로 인해 스크린쿼터와 영화진흥책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때 막 충무로에 진입해 이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은 젊은 제작자들이 한국영화가 제대로 제작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영화제작자협회 등을 만들어 발빠르게 대응한 덕에, 영화를 제작하는 데 불편이 없는 현재의 환경이 마련됐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영화진흥위원회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1세대 프로듀서 3인 인터뷰-기획시대

대표 유인택

“의미와 당위보다, 사업하겠다”

기획영화가 싹트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경력이 복잡하다.

→ 공연기획자로서 88년 제1회 민족극 한마당을 할 때 (서울대 연극반 후배인) 신철이 찾아왔다. <시험풀이>라는

연극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다리를 놓아줬다. 그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이다. 그뒤 민예총 사업국장을 1년

했다. 그때 민예총 전국조직이 탄생했다. 87년 대선 뒤 운동권이 분열할 때 제일 먼저 전국조직을 건설한 게 딴따라였다는 자부심을

기초로, 나도 전문성을 가지자, 이제는 시민사회다, 그런 생각을 했다. 선배들에게 3년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러고서 어디로 갈까,

찾은 게 영화였다. 89년 10월 모가드코리아에 들어가서 주로 수입외화를 홍보했다. 1년 뒤 286컴퓨터 중고품 20만원짜리

사달라고 했더니, 안 사주더라. 여기는 안 되겠다 싶었는데 마침 이장호 감독이 판영화사를 차려 기획실장으로 갔다. 92년 초에

다시 철이가 왔다. 신씨네 월급사장으로 모셔가겠다는 거였다. 거기 가서 <결혼 이야기>와 <미스터 맘마>를 했다. 그리고 93년

기획시대를 차렸다.

3년 지났는데 왜 문화운동으로 안 돌아갔나.

→ 어영부영, 영화에 미친 거지. 또 영화계에 세대교체, 스크린쿼터, 영화법 개정 등 개혁할 현안이 많았다.

명분도 있었던 거지.

지금 <결혼 이야기>와 <미스터 맘마>를 평가해보면.

→ 기획영화의 태동은 둘을 묶어야 한다. <결혼 이야기>가 기폭제였다면 <미스터 맘마>는 확인사살이었다. <결혼

이야기>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서 우리가 직접 제작·배급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인 게 <미스터 맘마>이다. 지방극장에

프리세일로 5억원, 대우에 비디오 판권으로 3억원 등 8억원을 미리 확보하고서 만들었다. 최민수, 최진실 당시로서 남녀 톱배우

둘을 함께 묶어 매니저 배병수와 1억원에 계약한 것도 <결혼 이야기>의 성공 덕이다.

기획시대를 차린 뒤에는 기획영화가 별로 없는 듯한데.

→ 아니다. 장선우, 박광수 영화만 기억해서 그렇다. 어린이용 영화시장을 개척하자, 대우랑 손잡고 <홍길동 대

터미네이터> <꾸러기 노래방> 등 비디오영화도 만들었다. <꼬리치는 남자>는 개가 주인공이니까 외국배우가 더빙하기 좋아 수출

잘되겠다는 산업적 마인드로 기획한 거다. 퀄리티가 안 따라주니까 문제였지. <현상수배> <이방인>도 국제적 마인드로 한 거다.

<이재수의 난>도 그렇고.

최근 <일단 뛰어> <해적, 디스코왕 되다> 등의 성적이 좋다.

→ 나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90년대에는 영화운동한다는 마인드가 있었다. 의미와 당위성을 두고 있었다.

지금은 영화계도 정비할 것이 정비됐다. 나는 사업가가 되겠다. 우선은 기획시대가 100억원 벌고, 그러고나서 좋은 아이템

가지고도 투자자를 못 구하는 다른 제작자들까지 펀딩해주는 좀더 큰 차원의 제작자가 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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