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에로영화계의 스타감독에서 데뷔작 준비하는 봉만대 감독 스토리(1)
2002-08-09

˝넌 멜로 하냐? 난 에로 한다˝

Q:처음 섹스한 게 언제죠?A:고등학교 졸업한 뒤 여자친구하고 했는데요. 사실 마스터베이션을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된 상태였어요. 주위 친구들에 비해 굉장히 발육이 늦었죠. 뒤늦게 눈떠서 그런지 욕심이 과하게 생기더라구요. 군대가기 전까지 정말 많이 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통성명하고 나면 곧장 자러 가곤 했으니까. 그렇게 1년 정도 보냈더니, ‘만나서 하는’ 과정이 너무 지겹던데요. 그뒤로는 시들해졌죠Q:성이란 게 어차피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죠. 어떨 때 섹스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요?A:비오는 날 있잖아요. 부슬비말고. 우박만한 굵기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그런 날은 창 밖을 보고 있으면 증상이 정말 심해요. 반대로 너무 밝은 날은 죽어도 하기 싫어요.

봉만대(32) 감독은 엉뚱한 데가 있다. 오디션 보기 위해 찾아온 남자배우에게 ‘별걸’ 다 물어본다. 동석한 매니저가 여자인데도 거리낌없다. 심지어 중간에 자신의 경험까지도 친절하게 들려준다. 영문 모르는 이로선 “웬, 성상담 클리닉?” 할 것이다. 조금 지나자 매니저도 뻘쭘했는지 은밀한 대화에 끼어든다. ‘별난’ 오디션이지만, 기겁할 필요까진 없다. “섹스해봤냐?”고 대뜸 묻는 무뢰한도 아니고, 섹스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는 호색한은 더더욱 아니니까. 그렇담 왜 하필 섹스? “저요. 봉만대. 에로감독이거든요. 근데요. 그냥 에로감독은 아니거든요.”

충무로, 1%에 10억원을 걸었다

예정대로라면, 기획시대에서 제작하는 봉 감독의 <사랑>(가제)은 9월 초에 크랭크인한다. 불과 한달 뒤다. 남자배우는 대강 윤곽이 그려지는 중이다. 여배우는 좀더 만나서 캐물어야 한다. 어찌됐건 감독이 일대일 만남을 느긋하게 즐길 만한 상황은 분명 아니다. “공개 오디션을 하면 배우들의 우열을 가리기 쉽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물론 안다. 동시에 그는 우려한다. 이 경우, 배우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자신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몇 가지 테스트만으로 ‘가능성’까지 판단할 순 없다고 믿고 있다. 스스로 ‘인물탐구’라고 명명한 특이한 오디션 작업을 택한 것도 오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서다. 그는 오디션에 “내 자신을 상대에게 설명하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말하지 않아도, 이건 그의 전력(前歷)과 관련이 있다. 그는 자신이 충무로 데뷔전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제작사에서 내 영화를 만드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보일까 말까한 가능성 1%에 10억원을 걸었기 때문이다.” ‘음란하고 저속하기 그지없는’ 15편의 에로비디오가 그 1%의 근거다. 부연하면, 그는 천출(賤出)이다. ‘에로비디오 출신’ 감독인 것이다. 에로비디오 재킷에 붙은 ‘빨간’ 딱지를 보라. 단순히 18세 관람불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여전히 ‘불량식품’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딱지는 이를 판별하기 위한 손쉬운 표식이다. 정리해보면, ‘불량식품’ 만들던 그 감독, 어찌하여 지금 충무로에 있단 말인가 정도다.

‘에로비디오 출신 감독 1호’라는 세간의 수식은, 그래서 봉만대 감독에겐 부담이다. 그는 “이번 작품이 데뷔작이 아니라 16번째”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35mm 카메라로 작업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또한 충무로가 인생 최대의 목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경계에 균열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역풍을 뚫고서 그는 과연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구로사와 기요시나 수오 마사유키 같은 일본의 핑크빛 기린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지난 3년 동안 그가 치른 ‘밑바닥 분투’로 판단해보시길.

눈물나는 15년 전 한마디, “무슨 학예회냐”

“크는 애, 기죽이지 맙시다.” 그의 여덟 번째 AV(Adult Video) <아파바>에 나오는 대사다. 래퍼를 꿈꾸는

파도라는 이름의 남자주인공은 오디션장에서 수모를 당한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심사위원에게 독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부탁이니, 제발

기 좀 죽이지 말라고.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 또한 똑같은 대사를 속으로만 읊었다. 당시 서울예대 동랑예술제에 참가하기 위해 친우

셋과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던 그는 “이게 무슨 학예회냐”는 핀잔만 듣고 낙향하면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경멸의 시선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촌놈 넷이서 연극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매하신 심사위원들 눈엔 우스꽝스런 쇼로 보였을지 모른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 무대를 찾고, 배우를 꿈꾼 건 뜻밖에 얻어들은 칭찬 때문이었다. ‘너 얼굴보니 배우해도 되겠다’는 친구 애인의 말에 ‘혹’한 것. “넌, 이거 하면 잘하겠다”는 기대 한번 받지 못한 터라, 그는 곧장 연기학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잠재된, 아니 숨겨진 끼라도 있었던 것인지, 이후 학교에서 행사가 열리면 으레 사회를 도맡는 처지가 됐고, 슬그머니 솟은 용기를 무기로 내친 김에 서울에서 벌어진 큰 무대에 도전했다 쓴잔을 들이켠 것이었다. 그는 “상을 달라는 게 아니었다. 이왕 내준 무대라면, 내버려둬도 될 텐데. 대사 버벅거린 게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면박을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공부가 뒷전이어서였는지, 연기 실력이 모자랐는지. 그는 대학 문턱을 밟지 못했다.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번 돈으로 연기학원에 등록해서 이듬해 재기를 노렸지만, 그가 독학으로 해낸 건 눈대중만으로 ‘짠 80’이라는 당구 실력(?)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불 꺼놓고 당구장 다이에 누웠는데, 내가 뭐하는 놈인가 싶어 여러 차례 울었다”는 그는 결국 배우에의 꿈을 접는다. “어느 날 전자대리점의 캠코더에 찍힌 내 얼굴 보니까 아무래도 배우 얼굴은 아니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후 상경해서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눈칫밥을 먹던 그는 사촌형의 소개로 충무로 언저리를 맴돌다, 90년 이원승 주연의 아동영화 <돌아온 손오공>의 조감독으로 발탁되어 첫 월급 30만원을 받아들었다. “말이 조감독이지 완전히 시다바리였다”는 그는 이후 강남길이 <한지붕 세가족>의 인기를 등에 업고 출연했던 <영웅 후레쉬맨>에 참여한 뒤 군에 입대한다.

촬영장에서 생긴 일-

....<도쿄

섹스피아>

연이은 밤샘촬영 때문이었나. 3일째 헤드폰을 쓰고 있는데 환청이 시작됐다. 분명

한국말로 대사를 줬는데, 어찌 된 게 배우들의 대사가 내 귀엔 일본어처럼 들렸다. 나뿐 아니라 조감독도 헤드폰이 이상하다고

그랬다. 그나마 마리아 역으로 출연했던 사이키 교코가 아니었다면 마지막까지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쁘냐고? 아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외모는 좀 아니었다. 미모까지 갖춘 배우들을 쓰려면 하루에 1천만원이나 줘야 하는데, 그 돈이 어디 있나.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자 교코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마리아’ 하고 부르면 그녀는 항상 뛰어왔는데, 괜히 불렀다고 여겨질 만큼 황송했다.

질문이 많은 배우기도 했다. 신혼여행을 한국으로 왔었다는 그녀는 초짜 감독인 내게 서툰 한국말로 왜 왼손으로 담배를 펴야

하는지, 왜 여기서 치마를 벗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댔다. 그녀에게 수치심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모두들 녹초가 된

마지막 날. ‘엔딩 대강 찍고 접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그날도 교코는 5차례 테스트가 맘에 안 들었는지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달라고 졸랐다. 어쩔 수 있나. 열성에 감복하는 수밖에.

....<연어>

한달 전 찍었던 <이천년>에서도 주연 여배우가 출연 사실을 알게 된 부모에게 촬영

도중 붙들려가서 애를 먹이더니 이번에도 마지막 날 대형사고가 터졌다. 이규영이라는 배우가 출연키로 했는데 갑자기 증발한 것이다.

촬영 당일까지도 몰랐던 일이라 황당함은 극에 달했는데, 더 갑갑한 건 대타로 나온 정희빈이라는 이름의 여배우가 도대체 대사

암기가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본인도 갑작스런 일이라 놀랐을 법도

해서 할 수 없이 대사를 줄이고 상황만 설정해서 표정만 따오기로 결정했다. <이천년>이 사건을 중심으로 동적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과 달리 어차피 이번엔 심리묘사라든지 정적인 느낌을 강조해보자는 의도였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

큰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배우가 노출은 죽어도 싫다고 했다. 에로영화 찍는데 안 벗겠다니. 시간이라도 충분했다면 설득이라도

했겠지만, 그러고 말고 아웅다웅할 겨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겨울에 바깥에서 옷 입고 관계를 갖는 설정으로 바꾸었고,

주로 얼굴만으로 섹스의 느낌을 전달해야 했다. 나중에 영상원 학생들이 “<연어>가 죽인다”고 했다는데,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글쎄.

....<고자질>

2001년 4월이었으니까 멀쩡한 봄날이었다. 지원받은 외제 오픈카까지 굴리면서,

강원도 속초에서 촬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눈이 왔다. 뭐 별 뾰족한 수가 있는가. 시나리오에 없던 겨울장면을 추가로 집어넣기로

하고 일단 찍는 수밖에 없었다. 또 처음으로 내 영화에 부유층 자제를 등장시키긴 했는데, 헌팅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일단 속초에서 부티나는 집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간혹 발견한 집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선뜻 촬영을 허락해줄 리 만무했다.

죽도록 돌아다니다 발견한 곳이 그나마 분위기 낼 수 있는 방갈로. 사정해서 겨우 찍었는데 이 장면은 나중에 심의에서 잘려나갔다.

그러다보니 재력을 가진 인물임을 드러낼 수 있는 설정이라곤 영화 속에선 오픈카밖에 없었다. 야외에 오픈카를 세워두고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집어넣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갑작스레 엄습한 추위 때문에 닭살 돋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인간적인

미안함과 함께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일 수밖에 없는 건 필시 기후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엔 추워서 못하고, 여름엔

더워서 못하고. 남는 건 봄, 가을인데 즐기기엔 너무 짧은 것 아닌가 하는.

....<모모>

조건은 예전보다 좋았다. 일본쪽 업자들이 촬영장소뿐만 아니라 이름있는 배우를 캐스팅해주기로

약속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은 드라마를 원한다고 했다. 어차피 노출과 표현 수위로만 따지면 일본 포르노물과의 경쟁이 안 될

테니 그 안에서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내 영화 역시 어차피 일본처럼 실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화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촬영이 진행되는 도중 일본쪽 배우들이 ‘못 벗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처음엔

누굴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냐고 묻기에 별 생각없이 한국 사람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말했다가 일본 여주인공의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이 화근인 줄 알았다. 결국 한국과 일본, 양쪽 제작사쪽의 의견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인데. 어쨌든 우리쪽도 그때는 ‘카메라

걷어’라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서기도 했다. 물론 난 ‘이거 접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말을 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곧잘 촬영현장에서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았더라면 그때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양쪽의 강경한 기류가 사그라들고 나서 촬영은 재개됐는데,

쫑 하던 날 일본 배우들이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저 여배우가 날 좋아하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도 잠시 했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