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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뒤,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묵시록 <레인 오브 파이어>
2002-08-12

더블린 시가지에서 제일 눈에 많이 띄는 게 성당과 펍(술집)이다. 매일같이 흐리고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 반나절 정도 해가 비치는 이 도시는 항상 회색빛인데도 공기가 맑아 시계가 멀리까지 열린다. 10층 넘는 건물이 몇개 없고 주변에 높은 산도 없다. 나지막한 지붕들 바로 위로 잿빛 구름이 평행선을 그리며 달린다. 날씨가 흐려도 우리나라처럼 하늘이 뿌옇지가 않고 구름의 형상, 그 변해가는 모습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마치 하늘이 낮게 내려와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뾰족하게 솟은 성당들이 풍경에 어울린다.그러나 시의 모습이 종교적이지는 않다. 작고 오래된 건물들이 아담하고, 지붕과 문에 칠해진 페인트 색이 다양하고 선명하다. 그 사이사이로 길모퉁이마다 펍이 들어선 이곳은, 낮게 드리운 구름과 함께 냉소와 유머 그 중간쯤의 감정으로 뜻밖에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제임스 조이스와 흑맥주 기네스의 도시답다.용이 지배하는 땅, 그에 대항하는 인간들

더블린에서 지난 7월 말 <레인 오브 파이어>의 감독과 출연진 인터뷰가 진행됐다. 디즈니가 스파이글라스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이 미국영화는 더블린이나 아일랜드의 역사, 문화와는 연관이 없다. 지구에 괴생명체가 나타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인류를 공격한다. 그에 맞서 핵무기를 사용한 결과 지구는 참담하게 파괴되고, 인류는 극소수의 생존자만 남았다. 그러나 괴생명체들은 아랑곳없이 활개치면서 지구를 지배한다. 영화는 이 묵시론적 이야기의 배경으로 런던과 근교 산악지대를 설정하고, 촬영을 아일랜드에서 했다. 촬영지의 수도라는 걸 연고삼아 디즈니는 더블린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기자들을 초청했다.

잿빛 하늘 바로 아래 기네스 맥주 같은 암갈색 땅이 가파르지 않게 경사진 아일랜드 산악지대는 <레인 오브 파이어>의 배경이 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12살 소년 퀸은 어머니와 함께 런던의 지하터널을 탐사하다가 용의 형상을 한 괴생명체를 발견한다. 수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이 괴물은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터널을 지나 땅 위로 날아오른다. 퀸은 어머니가 괴물에게 받쳐 죽는 걸 바로 옆에서 목격한다. 20년 뒤 어른이 된 퀸(크리스천 베일)은 핵폭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런던 근교에 땅굴을 짓고 집단생활을 한다. 괴물의 공격을 피해 잠깐씩 밖에 나가 경작을 하고, 여차하면 땅굴로 도망쳐 들어와야 하는 위태로운 공동체에서 퀸은 리더가 돼 있다. 이곳에 미군 해병대 출신 용병대장 벤젠(매튜 매커너헤이)이 대원들을 이끌고 찾아온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사냥해 잡은 괴물의 이빨을 목걸이로 하고 다니는 벤젠은 퀸과 달리, 괴물에 대한 적개심에 사로잡힌 호전적인 인물이다. 헬기와 탱크, 레이더 특수장비를 동원해 괴물을 사냥할 때 벤젠의 눈빛은 미치광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 퀸은 주민들의 생명을 중시하는 온건파에, 어릴 때 괴물의 공격을 받은 경험이 피해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괴물과 맞서 일대 전쟁을 벌이자는 벤젠의 선동에 공동체는 분열한다. 퀸은 벤젠과 주먹싸움까지 벌이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벤젠을 따라 떠난다.

퀸과 대립할 때 벤젠은 잠깐 동안 <수색자>의 에드워드 이든을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야만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문명공동체를 보호하려 하지만, 문명을 야만과의 전쟁으로 내몰기 때문에 그는 위험하다. 그러나 <레인 오브 파이어>의 괴물들은 인디언과는 분명히 다르다. 야만도 아닌, 그저 괴물일 따름이다. 이내 벤젠은 무모한 전쟁광으로 바뀌고, 거기 더해 괴물의 가공할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원과 주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는 실수를 범한다. 이제 침착해진 벤젠이 용기를 되찾은 퀸과 합세해 괴물과 싸우는 <레인 오브 파이어>의 행보는 <고질라>나 <인디펜던스 데이>를 따라간다.<레인 오브 파이어>는 약간 혼란스런 기획이다. 괴물의 등장으로 인류가 위기에 처하는 SF 틀에, 묵시론적 배경을 깔고, 대립하는 두 캐릭터의 드라마까지 집어넣었다. TV시리즈 을 연출하고, 영화 에 이어 두 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롭 바우만(40) 감독은 재앙액션 못지않게, 재앙 뒤에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 관심 때문인지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아귀가 잘 안 맞아 이따금씩 파열음을 내지만, 그 기이한 병치가 가끔씩 할리우드 메이저회사가 만든 영화에서 찾기 힘든 B급영화의 맛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체력단련 위해 소와 레슬링도 했다”

인터뷰 기간에 다음 영화 <열흘 안에 남자와 헤어지는 법>을 촬영하느라 토론토에 있던 매튜 매커너헤이는 더블린의 기자들과 영상 회견을 가졌다. “머리를 면도해서 총알처럼 보이게 하고, 수염을 8개월간 기르고, 더블린의 스포츠센터에서 몸매와 체력단련을 했다. 주로 역기를 들었고, 복싱도 했다. 또 목장을 뛰면서 소와 레슬링도 했다.” “전형적인 미국인의 이미지를 지닌 점 때문에 캐스팅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실제로 텍사스 출신 32살의 순수 미국인이다. 나는 언제나 위대한 미국인을 연기하고 싶다”고 답했다. 또 자신이 연기한 벤젠에 대해 “벤젠도 위대한 미국인상이다. 미국인이 언제나 사랑하는 것은 명예훈장이다. 행동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것이 미국 역사의 이미지기도 하다. 벤젠이 바로 그런 이미지”라고 설명했다. 더블린=임범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