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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1)
2002-08-16

핑크빛 플레이걸,포에버

먼로는 단 한번도 지난해처럼 행복한 생일을 지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먼로는 살아서 맞은 마지막 생일을 중간에 해고된 영화 <Something’s God to Give> 촬영현장에서 보냈고, 그 두달 뒤 몸 속에 수면제를 가득 담은 채 죽었다.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느라 딸을 책임질 수 없었던 어머니도, 허물없이 마음을 기대게 될 정도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주지 않았던 남편들도, 그녀에게 사랑만 담긴 생일상을 차려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살아 있었으면 일흔다섯 번째 생일이었을 2001년, 미국인들은 그들의 50년대를 위로했던 먼로에게 서른여섯해 동안의 얼룩을 말끔히 지울 만한 선물을 준비했다. 먼로의 첫 전속영화사였던 이십세기 폭스는 그녀가 남긴 영화와 노래를 컬렉션으로 만들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첫 번째 책 속 브로마이드 모델로 그녀를 택했던 <플레이보이>는 ‘플레이걸’들을 모아 영화 속 먼로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21세기 금발 미인들이 보내는 변함없는 찬사를 전시했다. 편견으로 가득 찬 수십년을 통과해 마침내 따뜻한 조명 아래 선 마릴린 먼로. <브라질>의 작가 존 업다이크가 97년 <플레이보이>에 기고했듯, 올해로 죽은 지 꼭 40년이 되는 먼로는 “깨져버린 비너스 조각상처럼, 시간을 정복했다”. 먼로는 태어난 날인 1926년 6월1일부터 이미 버려진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심한 신경쇠약 때문에 혼자 버티기도 힘들었고,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척 귀여운 아이였을 텐데도 먼로는 뒷날 “어렸을 때 내게 예쁘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소녀들은 설사 못생겼더라도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게 마련인데”라고 고백해야 했다. 무관심 속에 방치돼 질식사할 뻔했던 두살의 먼로와 유일하게 놀아준 옆집 아저씨에게 강간당하다시피 했던 여섯살의 먼로, 고아원에서 일주일에 5센트를 받으며 부엌일을 하던 아홉살의 먼로. 클라크 게이블이 아버지였으면 하고 혼자 꿈꾸던 그녀는 고작 열여섯살에 ‘아빠’라고 부르던 스물한살의 비행기 공장 노동자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던 미운 오리 새끼 그무렵 먼로의 이름은 노마 진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먼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로버트 미첨은 우연하게도 당시 비행기 공장에서 일했는데 같은 라인 동료 중에 도허티라는 성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멀리서라도 어린 먼로를 몇번 본 미첨은 “먼로는 전혀 섹시한 여자가 아니었다. 굉장히 수줍어했던 모습만 기억에 남는다”고 갈색 머리의 노마 진을 회고했다. 평범한 스웨터 속에 가슴을 숨기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던 여자가 모델이 된 까닭은, 먼로의 말대로라면 “죽도록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에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도 하나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염색과 성형수술을 거치기 전이었다고 해도 도허티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젊은 아내를 냉대했다는 소문. 사람들은 <뜨거운 것이 좋아>를 찍고난 토니 커티스가 먼로와의 키스신을 “히틀러와 키스하는 기분”이라 표현했다는 가십, 어렸을 때의 상처, 먼로의 남편들이 유독 빨리 그녀를 떠났다는 사실을 여기에 더해 먼로에게 성(性)적인 문제가 있을 거라고 수군대곤 했다. 먼로와 그녀의 남자들친구로, 연인으로, 남편으로 ♣ 제임스 도허티: 마릴린 먼로의 첫 남편. 열여섯의 노마 진을 돌봐주던 어머니의 친구 그레이스가 적극적으로 만남을 주선해 1942년 서둘러 결혼하게 됐다. 비교적 평온하게 자란 도허티는 이집 저집을 전전하느라 요리도 배우지 못했던 노마 진의 어두운 면과 동료들의 눈길을 끌던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감당하지 못해 46년 이혼했다. 그는 뒷날 <마릴린 먼로의 비밀스런 행복>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결혼생활을 밝은 색채로 각색하기도 했다. ♣ 조니 하이드: 모리스 에이전시의 부사장으로 먼로와는 연인이자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이드는 먼로가 아직 무명이던 1948년 말 처음 만나 그녀가 광고와 영화일을 맡도록 주선했다. 하이드는 먼로보다 서른한살이나 많았던 유부남. 그는 먼로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먼로는 그로부터 독립하려 했고 틈틈이 다른 남자를 사귀기까지 했다. 그러나 50년 하이드가 심장병으로 죽은 뒤, 먼로는 계산없이 자신을 돕던 친구를 잃은 슬픔에 잠겼다. 엘리아 카잔은 그 공백을 이용해 한동안 먼로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 왼쪽부터 제임스 도허티, 조 디마지오, 아서 밀러, 이브 몽탕♣ 조 디마지오: 야구복을 입은 먼로의 사진을 보고 반해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56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세운 당대의 스타선수였던 디마지오는 먼로와 달리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보수적으로 교육받았다. 그는 먼로의 옷차림이나 연기생활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9개월 만에 이혼했다. 그러나 61년 뉴욕 정신병원에서 먼로를 꺼내준 뒤 다시 한번 그녀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디마지오는 2주일에 한번씩 먼로의 무덤에 장미를 가져다놓곤 했다.♣ 아서 밀러: 사회주의자로 의심받아 소환된 국회 청문회 TV중계 도중 먼로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 <세일럼의 마녀들> 등을 쓴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그는 먼로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했던 엘리아 카잔으로부터 그녀를 넘겨받았지만, 순진하고 육감적인 그녀의 낯선 분위기에 곧바로 끌려들어갔다.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먼로를 잊고 지내던 그는 결국 디마지오와 이혼한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 됐다. 그러나 먼로는 밀러로부터 아버지의 모습을 찾고 싶어했고, 밀러는 먼로에게서 그늘없는 행복을 구하려 했다. 잘못 만난 두 사람은 결혼한 지 5년째인 61년 이혼했다.♣ 이브 몽탕: 캐리 그랜트와 록 허드슨이 거부한 <사랑합시다>에 출연하면서 먼로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그때 몽탕은 시몬 시뇨레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촬영 때문에 서로 다른 대륙에 떨어져 있어야 했다. 두 배우는 배우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을 나눴고 서로의 방갈로를 드나드는 모습이 언론에 목격되기도 했다. 이 만남은 짧은 연애로 끝났다. 남자들에 의한, 남자들을 위한 환상 먼로는 도허티와 이혼한 1946년 즈음 이름과 머리색을 바꿨다. 그뒤 수영복이나 잡지 모델로 일하면서 영화사와 계약과 해고를 반복하던 어느 날, 주로 글래머 여배우들을 찍던 사진작가 톰 켈리가 할리우드 선셋대로에서 사소한 자동차 사고 때문에 옥신각신하던 금발의 먼로를 발견했다. 켈리는 차비가 없던 먼로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명함을 건넸지만, 붉은 커튼 앞에서 찍은 그 유명한 ‘누드 캘린더’는 제작사가 영화배우로서 먼로의 유명세를 듣게 되기까지 1년 넘게 켈리의 창고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동안 이십세기 폭스와 MGM, 콜럼비아가 먼로처럼 재능없고 발성 안 되는 배우에겐 단역도 넘친다며 회사에서 쫓아냈다. “자동차 수리비 50달러가 절실해서” 누드 사진을 찍던 먼로는 1950년부터 서서히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정글> <이브의 모든 것>은 먼로에게 짧지만 강렬한 순간을 부여했다.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해도 먼로는 서서히 스크린을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1951년 <사랑의 둥지>와 52년 <멍키 비지니스>를 거쳐 53년, 먼로는 마침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저능아에 가까운 금발의 쇼걸 로렐라이 리를 맡기에 이르렀다. 동료로 출연한 제인 러셀은 먼로의 10배에 달하는 출연료를 받았지만, 반짝이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돈많은 남자를 찾아 헤매는 이 천진한 백치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창문틀 사이에 끼인 모습으로 망가져도 사랑스러웠던 먼로, 관능과 순수라는 두 가지 이상이 샘물처럼 솟아났던 배우. 그녀는 악녀로 등장해 폭포수처럼 관능을 쏟아내는 <나이아가라>보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같은 코미디에서 더 자연스럽게 천성을 발휘했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뜨거운 것이 좋아>는 모두 50년대라는 시대를 송두리째 들이마신 먼로의 매력을 영원처럼 이어나간 코미디영화들이었다. <이유없는 반항>의 배우 내털리 우드는 햇빛 같은 먼로에게 이끌려 “스크린 속 먼로를 보면 누구라도 그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녀가 괜찮기를, 행복하기만을 빌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스타덤에 오른 그 순간부터 먼로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렸다. 그녀는 애타게 누군가를 원하면서도 정작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는 감당하지 못했다. <멍키 비지니스>의 주연 캐리 그랜트는 “먼로는 스탭들이 휘파람만 불어대도 당황해하는 부끄럼 많은 여자였다”고 떠올렸다. 그런 먼로가 수십만, 수백만의 시선에 둘러싸인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을까. 먼로는 “사람들이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할 수 있다면, 같은 이유로 미워하게 될 수도 있다”라며 혼자라는 불안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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