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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4인4색-심영섭이 본 <오아시스>
2002-08-23

그대,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았는가

사내는 모두가 겨울옷을 입고 있는 엄동설한에도 반팔 차림으로 콧물을 흘리고, 여자는 휠체어에 의지해 손바닥만한 하늘을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오아시스의 홍종두와 한공주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었다. 감독은 수선스런 시장통에, 나사가 널브러진 카센터에, 김칫국물이 누렇게 밴 아파트 벽에 주인공들을 숨겨놓고 ‘젊은이의 양지’로 박제돼버린 대한민국의 멜로에 일침을 가한다. 홍종두와 한공주,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게 사랑의 문제라면, 사랑이 ‘함께’ 자장면을 좋아하게 되고 콩밥을 싫어하게 되는 단순하고 연약한 것이라면, 그런데도 당신, 왜 아직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지 못했는가.

<오아시스>는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처럼 <오아시스>의 사랑은 대한민국에서는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거시적 이야기의 구조를 지녔던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이 산산이 부서진 가족과 근대화의 문제를 성찰하는 대의명분에 충만했다면, <오아시스>에 이르러서 이창동은 이러한 대의명분을 걷고 현재진행형의 미시적인 것들에 천착한다.

그러나 <오아시스>는 흔하지 않은 사람들의 흔한 연애담을 건드리면서도, 영화 만들기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할리우드가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의 공장임을 자임할 때, <오아시스>는 오히려 현실의 무게를 더하는 판타지의 그늘진 샘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아마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 방바닥을 빗자루로 쓰는 한공주를 할리우드가 리메이크했다면 틀림없이 교도소에서 출감한 종두와 공주의 감격적인 해후로 판타지에 대한 독성을 높였을 것이다. 어쩌면 공주를 성형수술해서라도 진짜 공주로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창동은 종두의 등에 식물처럼 업혀 있다 두발로 걸어 나와 장난을 치는 영양 같은 그녀를 잡아냄으로써, 영화가 태생적으로 판타지와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그러면서도 현실과 판타지의 간극은 얼마나 머나먼지를 아프게 일깨운다(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일이 단 한 프레임 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깨진 거울조각으로 나비를 만드는 공주의 판타지는 절절하다. 그것은 <오아시스>의 중심에 놓여 있는 문제, 추하고 마비된 육체의 구속을 끊어내는 사랑과 동일한, 추하고 마비된 현실의 구속을 끊어내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때에도 남아 있는 판타지로서, 현실을 되새김질하는 판타지로서, <오아시스>의 판타지는 진흙창에서 피워올린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났다.

그래서 <오아시스>를 보고 온 날은 한참을 걷고 싶었다. 비가 무척 와서 서울 시내가 온통 물 속에 잠긴 그날, <오아시스>의 영상들은 그 넘쳐나는 물 위에 거꾸로 떠서 흘러가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사랑 이야기인데도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의 세상과의 의사소통은 여전히 불발이었고 그러한 해피엔딩에 마냥 감격스러울 수도 없었다.

종두와 공주의 첫날밤은 세상과 주파수를 달리한 소란스런 잡음으로 오인된다. 둘은 일상의 데이트를 원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식당에서 내몰고 먼지가 덥수룩하게 쌓인 카센터 한편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창동 감독은 종두와 공주의 사랑으로 ‘우리’와 ‘그들’을 나누려 했던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하든 소통 불능의 상태가 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공주 같은 의사소통의 장애인이자 종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이다. 그것이 이창동 감독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끝까지 비밀로 남겨놓은 이유는 아닐까.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알려져도 끝내는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원래 모습이므로.

<오아시스>에서 나는 사랑영화를 보면서도 주인공의 사랑 자리에서 계속해서 배제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심지어 그들이 서로의 육체를 통해 처연하게 사랑을 확인할 때도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이방인으로 남겨져 있었다. 공주의 아파트 열쇠는 화분 밑에 숨겨져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아시스>는 한국판 <작은 신의 아이들> 대신 순도 100%의 사랑영화가 되어갔다. 나는 문득 <오아시스>가 판도라의 상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창동은 상자의 문을 따서 온갖 현실의 악취를 다 보여주고는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랑이라는 희망만 남겨놓고 상자를 닫아버렸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성복의 시처럼 가슴 위의 것은 다 헛것이라 느낀다. 아주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상자의 문을 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에 이가 시리다.

그러니 그대 <오아시스>를 보고도 마음을 빼앗기지 못한다면 이승의 낙타로 살아가리라. 지옥 같은 사막의 빌딩 사이를 헤집고 영겁의 갈증에도 목이 타본 적 없는 한 마리 물기없는 낙타로 남으리라.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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