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우렁이 뿔을 머리에 붙이고 독 안에서 살며시 나오던 <우렁각시>의 채명지는 실제로 만나보니 놀라울 만큼 자그마한 몸을 가진 배우였다. 영화를 볼 땐 참 독이 크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웬만한 독엔 다 들어갈 만큼 작았던 것이다.

채명지는 남기웅 감독의 <우렁각시>에서 우렁각시 역으로 영화에 데뷔한 갓 스물두살의 배우다. 영화는 처음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침드라마 <파리공원의 아침>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해 <그 여자네 집>에서 김현주의 캠퍼스 친구로, 드라마 <상도>에서 사당패 ‘예쁜이’로, 조금씩 안방 시청자들의 눈길을 훔쳤던 얼굴이다. 그녀를 가장 인상적으로 알린 건 한 이동통신회사의 이미지 광고. 시골길을 홀로 걷다가, 길을 지나는 수녀를 만나 수녀의 자전거 뒷자리에 몸을 싣고 해맑은 웃음을 보이던 비구니, ‘사람과 사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카피가 잘 어울리던 모난 데 없는 따뜻한 인상의 그 어린 여승이 바로 채명지였다.

<우렁각시>는, 채명지에게 모험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그냥 ‘우렁각시 설화를 만화처럼 만드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만 알고 시작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출연작이 이토록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그냥 얌전하게 소복 같은 한복 입고 나와서 밥 차려주고 빨래 해주고, 그런 게 다가 아니더라구요. 뭐 불법무기 만드는 뒷거래 철공소에, 거기 사장님에, 우렁이 키우는 할머니에, 그 할머니의 반지를 갖고 있는 악역 기주봉 선생님에… 여러 인물들이 얽히고 설켜서 제 비중이 얼마나 될까 걱정도 좀 했어요. 하지만 그냥 평범하게 만들었다면 남기웅 감독님 스타일이 아니겠죠.”

<우렁각시>를 찍으면서 “하도 밤을 많이 새서 울기도 했다”는 채명지는 “너무 고생해서 다음에는 뭘 하든지 쉬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경기도 전곡, 충청도 서산 등에 꾸민 독특한 세트에서 100% 밤촬영으로만 완성된 영화 <우렁각시>는 남기웅 감독의 전작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보다 훨씬 비현실적이고 불가해한 상상력이 통통 튀는 작품이다. 독에서 우렁각시가 나오는 것이 그리 놀랍지 않을 만큼. 이 영화로 채명지가 스크린 신고를 하게 된 건, 남기웅 감독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화는 나중에 나이가 들고 성숙하면 해야지, 하고 생각도 안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이 저보고 ‘딱 각시 이미지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게 됐어요.”

“각시야, 밥먹어.” “각시 어디 갔어?” 촬영장에서 채명지는 이름 대신 그냥 ‘각시’로 통했다. 그만큼 실제로도 참하고 얌전한 이미지가 잘 맞는 건 사실이지만, 채명지는 “아, 걔가 걔야?” 하고 사람들이 말할 정도로 영 다른 역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추석 연휴에 방송될 특집드라마 <가족 만들기>는 그런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줄 것 같다. 거기서 채명지는 매번 맞선에서 퇴짜를 맞는, 고아로 자란 청년(김진수)을 장가보내기 위해 가짜 가족 연기를 해주는 동네 사람들 중에 끼어서 여동생 역을 맡는 다방아가씨를 맡았다. “차배달 왔다가 가짜 가족들이 대본 연습하는 걸 보고 끼어달라고 해요.” (웃음) 조금씩 다른 영역으로, 다른 배역으로 발길을 옮겨보는 채명지. “기네스 팰트로를 닮고 싶다”는 그의 다음, 또 다음 모습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