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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히로시마애니메이션페스티벌 [1]
2002-09-03

‘격세지감, 그리고 허탈감.’ 올해로 다섯 번째 방문한 2002년 히로시마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첫 인상과 끝난 뒤 단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러했다. 지난 8월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열린 히로시마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격년제로 열리는데 이번이 9회째이다. 이제는 제법 쌓인 연륜과 언론이 붙여준 ‘세계 4대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페스티벌은 다른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나 영상 관련 이벤트와는 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다른 페스티벌들이 외형적 규모와 상업적인 가치를 키워가는 데 비해 히로시마페스티벌은 늘 고집스럽게 비상업적인 작가 중심의 행사를 고집하고 있다. 자연 매번 특이한 이벤트나 주제로 눈길을 끄는 여타의 영상페스티벌에 비해 히로시마페스티벌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기껏해야 기획전의 내용이나 바뀔까. 프로그램 유형이나 진행방식, 행사장소도 똑같고 심지어 팔고 있는 페스티벌의 기념품들도 94년 처음 찾았을 때와 별반 다른 게 없었다.장르의 벽 무너져, 디지털애니메이션은 대세그런데 이처럼 비타협적이고 때로는 완고함마저 느껴지는 히로시마페스티벌에 올해 변화가 생겼다. 행사장을 안내하는 표지판에 영어와 일본어에 이어 한국어가 등장했고, 프레스룸이나 공식 안내방송에서도 어색하지만 우리말을 하는 진행요원이 등장했다. 지난 2000년, 8회 행사를 국내에 소개할 때 92년부터 꾸준히 작품을 참가하고 많은 인원이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우리에 대해 행사주최쪽의 무신경한 푸대접을 지적하며 “우리가 너무 짝사랑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드디어 우리말 표지판이라는, 작은 변화지만 히로시마페스티벌이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한 듯한 모습은 적잖이 나를 흥분시켰다(하지만 이 역시 나만의 지나친 짝사랑이었다).그다지 화려하지도 않고 상업적인 견본시나 캐릭터 상품 판매도 없는 히로시마페스티벌이 사랑받는 것은 예술영역의 하나로서 애니메이션이 가진 최신 경향과 발전방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8회 페스티벌부터 경쟁부문에 참가한 여러 작가들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실사영화 장면을 로토스코핑이나 픽실레이션 등의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재가공하는 형식을 뛰어넘어 아예 장르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이번에 우수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비르질 위드리히의 <복사가게>(Copy Shop)는 외관상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흑백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픽실레이션 특유의 경직된 동작을 볼 수도 없고, 인위적으로 그리거나 만든 영상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가는 정교한 편집과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화면을 자신의 의도에 맞춰 찢거나 구기고 때로는 다양한 모양으로 복사해 펼쳤다. 같은 우수상을 수상한 아르헨티나 후안 파블로 자라멜라의 <장갑>(The Glove)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부터 ‘애니메이션’(Animation)이란 말 대신 전체적인 장르를 아우르는 말로 ‘애니메이티드 필름’(Animatied Film)이 대두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아직 애니메이션을 영화의 갈래가 아닌 ‘움직이는 그림’으로 여기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몇년 전만 해도 논쟁을 빚었던, 컴퓨터를 활용한 디지털애니메이션도 이제는 더이상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세가 됐다. 특히 젊은 학생 작가들의 경우는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은 경우를 찾기가 오히려 더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지 슈피츠게벨이나 폴 드리센 같은 중견 작가들은 고집스럽게 ‘손’을 이용한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었다.나라별로는 아시아권의 작품이 부쩍 강세를 띠었다. 주최국인 일본 외에 한국과 중국의 작가들이 대거 경쟁부문에 올랐는데, 특히 과거에 비해 미국이나 유럽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지난 대회 때 이명하의 <존재>가 데뷔상을 받은 우리나라는 올해도 아론 김의 <천사>(Angel)가 우수상을 수상해 두 대회 연속 입상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눈길을 가장 끈 국가는 일본이었다. 지난 대회 때 한국 작가들의 선전에 부러움과 약간의 질시어린 시선을 던졌던 일본은 올해 본선에 5작품이나 올랐다. 양적인 면에서는 주최국의 프리미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내용적으로도 예전에 기교에만 치우쳤던 것에서 벗어나 이야기가 있고, 관객이 좋아할 만한 유머와 반전이 담긴 작품을 집중적으로 선정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경쟁부문에 오른 일본 작가 중 우수상은 무라타 도모야수의 <주홍길>(Scarlet Road)이 받았지만 <스키 점프 페어>를 발표한 마시마 리치로는 기발한 아이디어의 내용과 막간에 관객에게 본인이 제작한 신문 호외까지 만드는 ‘팬서비스’로 가장 큰 인기를 모았다. ▶ 제9회 히로시마애니메이션페스티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