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독립영화감독 시절에 보여준 자신만의 색깔을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도 훌륭히 지켜내는 감독으로 추앙받았던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게 바치는 오마주로 <싸이코>를 리메이크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평단의 차가운 반응은 물론이거니와 리메이크된 <싸이코>를 보이콧하는 운동이 인터넷에서 펼쳐졌을 정도였다. 한쪽에서는 아예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를 리메이크가 아닌 ‘리프로덕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비아냥이 나왔으니, 잘 나가던 감독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충격으로 인한 슬럼프는 다음 작품인 <파인딩 포레스터>까지 영향을 끼쳤고, 올 선댄스영화제에서 선보인 그의 최신작 <Gerry>까지 이어졌다. 한 네티즌이 IMBD에 올린 감상기에서, “도저히 못 볼 정도였지만 주연인 맷 데이먼과 게이시 애플렉 그리고 그녀의 오빠인 벤 애플렉이 객석에 있어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밝혔을 정도다.
물론 구스 반 산트가 <싸이코>의 리메이크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런 슬럼프에 빠졌다고 말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굿 윌 헌팅>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좀더 선명하게 만들 기회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던 그가, 갑작스럽게 리메이크를 선택한 것은 언뜻 생각해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리메이크의 실패가 가져올 충격을 예상하고 있었다면 자신에겐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그의 자만이 너무 컸던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때까지 그는 관객을 너무 우습게 생각했던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69분짜리 중편 <Following>에 이어 첫 번째 장편 <메멘토>를 통해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주목받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작품으로 리메이크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 놀랄 만하고 걱정할 만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개봉되어 평단의 호평과 함께 관객의 엇갈리는 반응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인썸니아>는, 그렇게 할리우드에 막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하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적절할 선택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였다. 물론 구스 반 산트가 선택한 <싸이코>만큼은 아니지만, <인썸니아> 역시 지난 97년 노르웨이에서 만들어져 좋은 평가와 함께 뛰어난 흥행 결과까지 만들어냈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은 너무나 명백했던 <싸이코>와 달리 <인썸니아>가 리메이크라는 것이 미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그다지 화제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단 잘 알려지지 않은 노르웨이영화인데다가, 98년 미국에서 단 2개 스크린으로 개봉된 것 이외에는 노르웨이 밖에선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던 영화였기 때문. 더불어 리메이크라는 사실이 혹 영화의 흥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걱정한 제작사와 홍보사가 애써 그 사실을 강조하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리메이크 <인썸니아>와 매우 유사한 장면들.♣ 촬영장에서 힐러리 스왱크에게 연기 지시를 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어쨌든 <인썸니아>의 원작인 동명영화는 65년생인 에릭 쇨비에르그 감독이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로, 워낙 시나리오가 좋아 제작 초기단계에서부터 노르웨이에서는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거기에 리메이크에서의 알 파치노 같은 역할인 조나스 형사 역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로 국제적인 스타가 된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출연하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아미스타드> <로닌> < 블루 씨> <어둠 속의 댄서> 그리고 최근에 개봉되었던 <글래스 하우스> 등 할리우드는 물론 대감독들의 영화에까지 출연하면서, 그의 지명도가 웬만한 할리우드 스타들에 비견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영화 내용은 리메이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스틸 사진들을 보다보면 원작과 리메이크의 장면장면이 아주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왜 <인썸니아>의 리메이크를 결심한 것일까? 한 웹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원작영화는 아주 놀라운 솜씨로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를 그려냈다. 특히 도덕적 딜레마를 영화의 한축으로 삼아 전개된 이야기는 놀랍도록 뛰어나다. 하지만 난 그런 원작의 상황을 조금 비틂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도덕적 패러독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선택한 이유다”라고 밝혔다. 더불어 그가 강조했던 것은 <인썸니아>의 리메이크를 시작한 시점이 <메멘토>가 개봉되기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메멘토>의 성공 여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리메이크를 선택하는 것에 전혀 부담을 갖지 않았다. 원작을 인상 깊게 봤고, 그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라며, <메멘토>의 성공이 리메이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리메이크의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가 밝히는 비밀은, 리메이크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자신을 포함한 제작진 중 누구도 원작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알 파치노와 로빈 윌리엄스에게 절대 원작영화를 보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을 정도다. 만약 원작을 본다면 그들이 어느 정도 고정관념을 가지고 연기에 임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결국 그런 철저한 자기 체화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썸니아>의 리메이크는 원작의 매력을 그대로 담으면서도 크리스토퍼 놀란만의 색깔이 강하게 묻어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이철민 /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원작 <인썸니아> 공식 홈페이지 :
http://www.nordic-screen.no/insomnia/english/homepage.htm
<인썸니아> 공식 홈페이지 :
http://dontcloseyoureyes.warnerbr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