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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코미디를 가장한 `관계`의 드라마 <어바웃 어 보이>
2002-09-13

관계한다,고로 존재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라고? 적어도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 윌 프리먼(휴 그랜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낙원의 섬이라고 규정한다. 이 영화는 섣불리 하나의 은유로부터 그와 상반되는 다른 은유로 이행하지는 않는다. 다만 윌의 은유는 약간 수정된다. 윌의 세계는 고도(孤島)에서 군도(群島)로 전환된다. 먼 옛날엔 하나의 산맥에 속해 있었던 서로 다른 산봉우리들이 바다 밑으로 침강해 이루어진 군도. 그러나 여전히 여기서 육지는 배제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윌에게 자신들 아이의 대부가 돼달라고 부탁했다 거절당한 친구부부- 윌은 “가끔은 육지에 나가봐야 한다”고 말하며 그들을 만나러 간다. 그들은 ‘쿨하게’ 사는 솔로 윌과 애가 딸린 이혼녀들, 그리고 아이들만이 등장하는 <어바웃 어 보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고 산다- 는 이 군도의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다. 온전한 하나의 가족을 이룬 이들은 이 파티에 초대받을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어바웃 어 보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쿨하게’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대안공동체 또는 대안가족에 관한 영화인가?

소비의 즐거움, 그 은밀한 매력

일단 위와 같은 식의 은유는 통찰을 흐릿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이 섬이건 아니건 고도이건 군도이건 윌에게 중요한 것은 정작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랍장 가득한 CD와 DVD, 위성방송과 커피메이커, 기분 내키는 대로 만났다 헤어질 수 있는 여자들, 가끔 찾아가는 친구, 생애 유일하게 캐럴송 한곡을 히트시킨 아버지 덕택에 꼬박꼬박 나오는 인세, 그리고 단위별로 쪼개져 ‘취직할 새도 없이’ 규칙적으로 바삐 돌아가는 일상. 이쯤 되면 윌의 삶은 공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윌은 그 자신이 주인공인 ‘윌 쇼’의 주인공이며 이 쇼는 ‘앙상블드라마가 아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윌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은 그의 삶 전체가 공백- 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윌을 묘사할 때 쓰는 말들은 ‘blank’, ‘nothing’, ‘nobody’ 등이다- 이었다는 사실이다. 윌은 섬이라기보다는 섬처럼 보이는 비어 있는 구멍이다. 영화 속에서 윌이 도시의 군중 틈에 섞여 거리를 걷는 모습이 나온다. 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그가 가는 곳과는 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망원렌즈로 촬영된 이 숏은 인물의 고립감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는 영화적 상투구에 불과하지만, 윌의 존재를 섬에서 공동(空洞)으로 바꿔놓기엔 그다지 부족함이 없다. 그는 다른 이들의 흐름이 만들어낸 흐르는 구멍에 불과하다.

그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오직 소비할 뿐이다. 이와 같은 윌의 삶의 방식은 영화 끝까지 관철된다. 아마 이것이 <어바웃 어 보이>를 매우 영리한 결말을 지닌 영화로 보이게 하는 한 이유일 것이다. 정말이지 <어바웃 어 보이>는 매끈하고 맵시있게 잘 다듬어져 있다. 워낙 모난 데도 없고 움푹 팬 곳도 없어 오히려 더 이상하다. 우리는 마음 편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휴 그랜트가 보여주는 썩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에 흠뻑 빠져들기만 하면 된다. <어바웃 어 보이>는 무엇보다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영화이며 좀더 ‘쿨한’ 라이프스타일의 완성을 위해 달려가는 영화다. 그 가운데 이 영화는 꽤 매력적인 제안을 감추어 두고 있다. 그건 바로 소비의 즐거움이다. 윌은 특히 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소비하는 일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 또 한 가지, 윌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문화이다. 덕분에 <어바웃 어 보이>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것은 고전적 로맨틱코미디- 가령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귀여운 여인>에 이르기까지- 에서와 같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취향의 문제가 된다.

이것은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다

하지만 <어바웃 어 보이>는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다. 단지 처음에 그런 것처럼 가장할 뿐이다. 윌이 애가 딸린 이혼녀가 최상의 연애상대라는 점을 깨달은 뒤 SPAT(Single Parents Alone Together) 모임을 통해 만나게 된 수지는 잘못 선택된 대상이다. 그건 윌과 수지의 관계를 매개할 대상으로서의 아이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윌은 자신에게 두살 난 아이가 있다고 속이고 SPAT에 가입한다), 있다고 하더라도 수지의 딸처럼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또는 그 아이에게는 내레이션이 없기 때문이다. <어바웃 어 보이>는 <마이키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내레이션이 없는 수지의 딸을 대신해서 윌과 수지 사이에 끼어드는 이가 바로 소년 마커스(니콜라스 홀트)다. 이제 윌-마커스-수지의 관계는 마커스의 어머니 피오나(토니 콜레트)의 자살을 계기로 해서 윌-마커스-피오나의 관계로 전환된다.

사실 이는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윌과 마커스의 내레이션이 교대로 배치됨으로써 이미 예정된 일이다. 그러나 마커스는 윌과 피오나 사이에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 <제리 맥과이어>의 톰 크루즈와 르네 젤위거에 상응하는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로맨틱코미디의 관상학이라 할 만한 것이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다 자살기도까지 하고, 마커스가 애써 마련한 데이트에 우스꽝스러운 ‘개털코트’와 짐바브웨산 귀걸이를 하고 나오는가 하면, 피아노를 치며 <Killing Me Softly>를 간드러지게 불러대는 피오나는 윌뿐만 아니라 (아마도) 관객에게도 전혀 매력을 끌 수 없는 존재다. 어쩌면 피오나 역에 토니 콜레트가 캐스팅되었다는 점을 문제삼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선택이 <어바웃 어 보이>의 결말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피오나의 자리를 여러분이 호감을 갖고 있는 다른 여배우로 채워놓았을 경우, <어바웃 어 보이>의 결말은 정말 기이한 해피엔딩이 되지 않았겠는가? 여하간 로맨틱코미디 서사의 진행은 여기서 차단된다. 윌-마커스-피오나의 구도는 다시 윌-마커스-(피오나)로 바뀐다. 이것이 <어바웃 어 보이>의 중요한 반전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반전은 결말을 위한 준비이며 여기엔 일종의 관상학적 편견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 <어바웃 어 보이>는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 아니다. 웨이츠 형제는 베르트랑 블리에만큼의 모험을 감행하진 않는다. 차라리 그 관상학적 편견에 있어서라면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윌과 마커스, 아버지와 아들?

이후 영화는 백수건달 윌과 마커스 사이의 유사부자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실 윌은 어느 정도는 <빅 대디>의 애덤 샌들러에 가깝고 한편으로는 (<어바웃 어 보이>와 원작자가 동일한 영화인)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존 쿠색과도 닮아 있다. 윌이 신문의 정치풍자만화가인 레이첼(레이첼 와이즈)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마커스 또한 같은 학교의 여자아이에게 빠져들면서 그 둘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피오나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커스는 윌의 시크한 취향과 구제불능의 히피 피오나의 ‘구시대적’ 취향 사이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윌은 마커스에게 최신 디자인의 운동화를 사주고 미스티칼(Mystikal)의 랩음악이 담긴 CD를 선물하기도 한다(한편 피오나가 마커스에게 준 선물은 탬버린이다). <어바웃 어 보이>의 매력은 사실 이 협상이 정말 그럴듯하고 수긍할 만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교내의 ‘키즈 록’(Kids Rock) 콘서트에서 피오나를 위해 <Killing Me Softly>를 부르려 하는 마커스를 말리고자 서둘러 피오나와 함께 학교에 찾아간 윌은, 결국 기타를 들고 마커스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피오나는 자신이 암암리에 마커스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해왔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결말부, 마커스는 전에 입던 구닥다리 옷은 싹 벗어던지고 답답해 보이던 헤어스타일도 완전히 바꾸어 제법 세련된 모습으로 윌의 소파에 누워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보고 있는 중이다.

윌과 마커스가 유사부자 관계에 놓여 있는 동안 잠시 윌-마커스-레이첼의 구도가 이루어진다. 잠깐 동안 레이첼의 아들이 윌에게 극도의 반감을 표하면서 관계가 불안해질 듯하지만, 영화는 다시 한번 영리하게, 그리고 매우 간단하게 정신분석학적 도식에 걸려들 위험을 껑충 건너뛴다. 관계가 깨지는 것은 오히려 윌과 마커스가 진짜 부자관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선 취향은 문제되지 않는다. 윌과 수지의 관계, 윌과 레이첼의 관계가 위기를 맞는 것은 윌이 ‘진실한’ 관계라고는 하나도 맺고 있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 즉 공백이기 때문이다. 윌의 깨달음은 바로 공백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고 그래서 <어바웃 어 보이>의 후반부는 단 하나의 관계라도 만들어내기 위한 윌의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캐럴송 듣기를 죽도록 싫어하던 윌이 그 노래가 실린 CD를 걸어놓고 굳이 유령과의 관계나마 맺어보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시당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마커스의 행위와 어느 정도 대구를 이룬다. 이는 윌과 마커스가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유령들- 윌은 쇼핑몰에서 죽은 아버지의 유령을, 마커스는 공원 연못 맞은편에 서 있는 어머니 피오나의 환영을 본다- 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이다. 그렇게 소년들은 성장한다.

그러나, 존재는 관계를 맺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은 아버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식 앞에 유령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윌과 마커스, 피오나, 레이첼과 그녀의 아들, 마커스의 여자친구, 윌이 잠시 인권단체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함께 하는 결말의 파티장면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좀 이상하다. 윌이 레이첼에게 청혼을 하게 될지는 아직 확실치 않고, 마커스와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약간은 어정쩡하며, 윌의 동료와 피오나는 친밀한 미소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사실 여기엔 아무런 대안이랄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보인다면 <어바웃 어 보이>가 결말을 지닌 영화가 아니라 결말 자체를 유예시킨 영화이기 때문이다. 윌과 마커스, 그리고 레이첼의 아들은 함께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프랑켄슈타인은 신부를 얻더라도 아버지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도.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