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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펜스탈의 다섯 조각의 인생
2002-09-30

히틀러 숭배자, 그러나 불멸의 재능

<올림피아>1902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리펜스탈은 무용가, 배우, 감독, 사진작가, 자서전의 작가로서 다섯 조각의 인생을 살았다. 처음 화가를 꿈꾸었으나 1920년 초 현대무대의 선구적 연출가 선구자 막스 라인하르트에게 발굴되면서 짧은 시간에 무용가. 안무가로서 국제적 각광을 받았다. 타고난 미모와 무용계의 새로운 인재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화계서도 관심을 보여 20년대 중반부터 알프스 배경의 <산 영화>(Bergfilm)의 주연배우로 등장하여 마를렌 디트리히를 뒤따르는 스타덤에 올랐고 주로 어려운 자연환경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여성 영웅을 연기했다.그리고 1932년, 리펜스탈은 극영화 <푸른 빛>의 연출자로 감독의 대열에 끼게 됐다. 영화는 어느 알프스 지방에서 아름다운 젊은 여성 준타(리펜스탈 역)가 돈 많은 남자의 탐욕에 희생되어 죽는다는 비극. 저명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영화학자 벨라 발라즈가 리펜스탈과 시나리오 공동 작업을 하여 감독의 위상을 한층 높여줬다.<푸른 빛>은 여러 면에서 리펜스탈의 인간성과 영화미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영화다. 첫째, 리펜스탈의 거짓말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리펜스탈은 발라즈가 시나리오 작업의 사례금을 요구하자 자기 변호사를 시켜 “유대인이 내게 돈 재촉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그 증거자료는 지금 독일 국립자료보관소에 보관돼 있는데 리펜스탈은 그건 가짜라고 우기고 있다. 둘째, <푸른 빛>에는 리펜스탈 작품의 특징인 “속이 빈 시각의 환상적인 연출력”이 보인다. 셋째, 히틀러는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한 나머지 리펜스탈에게 나치당의 총회에 대한 다큐멘터리영화를 부탁하게 된다.1933년,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마자 악명 높은 국민교육·선전부를 만들고 조세프 괴벨을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리고 조금 뒤 리펜스탈은 나치노동당의 영화부에 들어가 당을 위한 선전영화 단편 <믿음의 승리>를 만들었으나 히틀러는 싫어했다. 그러나 일년 뒤 1934년 선전영화의 교과서가 된 <의지의 승리>, 그리고 1935년 독일군대에 헌정한 <자유의 날>이 완성됨으로써 나치노동당을 위한 리펜스탈의 3부작이 끝났다. 1936년 리펜슈탈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올림피아> 2부작 ‘인류의 제전’과 ‘아름다움의 제전’을 만들었고 2년 뒤 영화관에서 상영됐다.1940년 히틀러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는 순간 리펜스탈은 히틀러 앞으로 감격에 넘치는 축하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같은 해 극영화 <저지대>의 촬영에 들어갔으나 1945년에야 끝났고 그나마도 프랑스 정부로부터 몰수당했다가 1954년 해제됐다. 1949년 리펜스탈은 바드 국가위원으로부터 “정치적 말살의 가담자”라는 선고를 받았으나 법적으로 죄인이 아님을 밝혔다. 1960년부터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 끝에 1972년 <선데이 타임스>로부터 뮌헨올림픽의 공식 사진기자로 선정됐고, 60년대부터 70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아프리카를 방문하면서 누바족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사진집 두권을 펴냈다.

<위대한 독재자>1994년 미국 감독 거이 베르린너가 만든 <레니 리펜스탈의 원더풀 호러블 라이프>가 미국 영화관에서 상영됐으나 비판정신이 결여돼 독일에선 비평의 목소리가 높았다. 2000년 리펜스탈은 98살의 나이에 다시 수단을 찾아가 누바족을 촬영하는 도중에 헬리콥터의 추락사고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나 같은 해 베를린에서 열린 자신의 사진전시회에서 리펜스탈은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나는 살아 있다는 듯 두팔을 떡 벌린 채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나보다. 그도 100살이 되면서 “무척 피곤하고 죽고 싶다”고 하면서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생애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했다.리펜슈탈의 대표적 영화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가 후세에 끼친 영향에 대해 간단히 쓰고 이 글을 끝낼까 한다. <의지의 승리>는 1934년 독일과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뒤 미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 세계 5대 선전영화의 하나로 꼽힌다. 나치군대의 유명한 거위 걸음, 신처럼 군림하는 단상 위의 히틀러, 열광하는 민중, 웅장한 건축과 조형물 등을 찍기 위해 리펜스탈은 30대의 카메라, 4대의 녹음기, 수십대의 자동차, 수십명의 헌병대를 동원했고 편집에 5개월이 걸렸다. 리펜슈탈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니까 제발 선전영화로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핑크 프로이드의 <더 월>, 폴 버호벤의 <스타쉽 트루퍼스>,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가 <의지의 승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리펜스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올림피아>는 자기 회사에서 제작했다고 썼는데, 실은 국제올림픽위원회와 괴벨스의 선전부가 위탁해 만든 것으로, 리펜스탈은 스포츠 보도의 전통을 깨고 20년대 중반부터 정부에서 권장하던 ‘신체단련’의 연장선상에서 선수들의 역동적이고 극적인 투전장면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췄다. 40명의 카메라맨이 참여하면서 경기장 가장자리에 카메라가 지날 수 있는 굴을 파고 수영선수의 다이빙을 밑에서 위로 찍고, 풍선에 카메라를 부착하여 공중촬영을 하는 등 리펜스탈의 새로운 촬영기술이 속속 나왔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라톤 선수(손기정?)의 달리는 장면을 바로 선수 등 뒤나 머리 위에서 찍은 점이다. <올림피아>의 촬영·편집기술이 올림픽, 세계축구대회 같은 대규모 스포트 행사장의 촬영에서부터 광고, 비디오 MTV 클립, 록과 테크노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젊은 세대의 세계에 깊숙이 파고든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레니 리펜슈탈 49년 만의 신작 다큐 <해저의 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