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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대여점과 만화시장 침체 유감
2002-10-10

만화가 세상과 만나는 법

곽상원의 <우리는 무지개를 타고 간다>라는 만화는 웹진 코믹스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거칠고 조악한 데생에 흔히 따르게 마련인 엽기적 이야기 대신 따뜻한 감성이 특이하다. 초록배매직스의 인디코믹스 7번째 작품으로 2000년에 나왔다. 한국만화의 소중한 자산인 이두호의 <객주>는 바다출판사에서, 고우영의 <삼국지>는 북하우스에서 고급스러운 장정으로 새롭게 출판되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명료한 선’으로 대표되는 <땡땡>의 그래픽은 유럽을 대표하는 시각이미지며 문화적 아이콘이다. 많은 유럽 사람들이 멋진 모험소년 땡땡과 그의 충견 밀루를 사랑한다. 도서출판 솔에서 모두 5권이 2002년에 출판되었다. 우데르조와 고시니 콤비의 <아스테릭스>는 로마에 맞선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현실문화연구에서 출판한 프라도의 <섬>은 몽환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작품이다. 이야기가 묘하게 중첩되며 독자에게 해석을 개방한다.

만화는 책이다. 우리는 만화를 보고 읽기 위해 구입한다. 좋은 작품은 내가 지불한 돈의 몇 곱절이나 되는 기쁨을 준다. 79년에 출판된 까치판 박수동의 <번데기 야구단>을 헌 책방에서 1천원에 구입한 때가 90년이었다. 그 책은 가장 가까운 책꽂이를 차지하고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갈 때 늘 동행한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마음을 교감하는 따뜻한 정과 넉넉한 유머, 그리고 이제 하나하나 거의 다 외우는 이야기의 즐거움을 다시 반복적으로 체험한다. 만화는 책이고, 우리는 그 책을 보기 위해 구입한다. 이 당연한 기본을 우리는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만화는 책이고, 만화잡지는 잡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자. 만화를 사랑하고, 잡지를 살리고 싶다면 단순하고 명료한 명제를 붙들어야 한다.

만화시장의 장기불황 - ‘팔리는 만화’가 없다

한국 만화시장은 장기불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 9월26일 출판만화산업중장기종합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 장소에서 서울문화사의 김문환 부장은 90년대 초반에 비해 시장이 1/10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공청회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판매시장 규모는 723.6억원 대 대여시장 규모는 5140억원으로 대여시장이 무려 7배에 달했다. 수치상으로도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1만개에 달하는 대여점은 만화소비시장을 교란시키고 상식적인 소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대여점의 가장 큰 문제는 만화가 책이 아니라는 의식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대여는 자본주의의 가장 고도화된 소비패턴이지만, 그것은 대부분 높은 가격의 재화에 해당되는 일이다(자동차나 캠코더처럼). 세상 어느나라에도 책을 빌려보고, 빌려보는 독자들을 겨냥해 책을 만드는 출판사는 없다. 우리는 50년대부터 오랫동안 ‘대여’라는 소비패턴을 통해 만화를 보았다. 모든 출판사들은 독자들을 겨냥해 만화를 만들기보다 만화방을 겨냥해 만화를 만들었다. 대여라는 소비패턴이 존재했을 그때부터, 1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보다 수십권씩 빠르게 생산해내는 만화 생산자가 부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더 쉽게 돈을 번 쪽은 출판사들이었다.

팔리는 책으로 존재하는 만화는 오랜 시간 만화문화의 주류가 아닌 변방에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능동적으로 팔리는 만화시장을 개척하기도 했다. 70년대 등장한 어린이 만화와 성인만화는 팔리는 만화, 책으로 존재하는 만화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길창덕, 윤승운, 박수동, 신문수 등의 명랑만화와 방학기, 이우정, 김형배, 김삼 등의 장르만화는 시리즈 문고를 통해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고우영이나 강철수의 극화 시리즈도 고급만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이 잡지에서 전환된 만화잡지는 물론 80년대에 등장한 전문만화잡지인 <보물섬> <주간만화> <만화광장> <르네상스> 등은 안정적인 수입구도를 만들어갔다.

80년대 후반 일본의 만화시스템을 학습한 출판사들이 주간지라는 새로운 개념의 만화잡지를 내놓았다. 초기에는 예전의 만화잡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점점 그들이 참조한 일본출판사의 잡지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90년대 우리가 경전처럼 외웠던, 잡지를 통해 단행본이 나오고, 만화원작이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되는 순환구조나 기자가 PD처럼 작가의 모든 과정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PD시스템, 엽서에 의한 섬세한 피드백 구조 등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일본식 시스템의 핵심은 ‘단행본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는 구조였다. 초기에 만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몇몇 작품의 힘에 기대 이 시스템은 성공하는 듯했다. 일약 서점용 만화시장이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을 선도하는 1작품의 힘은 대단해서,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잡지를 구매한 독자들이 다른 만화도 보게 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구매해줬다. 출판사들은 일본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단행본을 찍기 위해 일본의 판형과 재질을 그대로 도입했다. 일반 책과 견주어 페이지도 얇고, 종이도 좋지 않으며, 장정도 나쁘고, 가격도 쌌다. 비록 판매되지만 책의 상태는 만화방용 만화에 비해 조금 나아지는 정도에 그쳤다.

대여점 겨냥해 출판하는 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우리 시장에 대한, 우리 소비자에 대한 치밀한 분석없이 적용한 일본의 시스템은 배후시장의 비교할 수 없는 크기 문제로 인해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왜곡되기 시작했다. 시장을 이끌어가는 작품이 사라지고, 강력한 경쟁적 미디어가 등장하면서부터 출판사들은 판매의 감소분을 메우기 위해 종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건전한 시장의 시스템으로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만화가 쏟아지자 왜곡된 소비패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바로 ‘대여점’이다.

앞서 말한 공청회에서 대여권 도입 여부에 대한 발표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대여점을 효율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은 대여권을 도입하는 것도, 강제 폐쇄시키는 것도 아닌 만화를 책의 위치로 돌려놓는 것이고, 만화잡지를 잡지의 위치로 돌려놓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대여점을 겨냥해 과대한 물량의 책을 만들고, 안 팔리면 바로 재고처리를 하고 난 다음에 다시 사람들이 찾으면 새 판형으로 찍는 출판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단행본을 찍기 위해 원고 수급의 통로로 잡지를 만들고 수익 보존은 단행본 출판을 통해 하는 잡지는 잡지가 아니라 카탈로그다. 책은 책이고, 잡지는 잡지다. 만화는 세상과 책으로 잡지로 만나야 한다. 지금처럼 물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금방 사라져서 재고가 되고, 살 수 있는 서점은 어디에도 없는 악순환은 극복되어야 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