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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리마스터링판 개봉하는 <위대한 독재자>,찰리 채플린(2)
2002-10-11

위대한 어릿광대,눈물로 빚은 웃음

채플린의 첫 장편 <키드>에서 떠돌이 찰리가 길에 버려진 아이를 기르게 되는 대목은 캐릭터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보여준다. 특유의 우스꽝스런 걸음으로 걸어오는 찰리, 골목에 버려진 아이를 보고 난감해하다 지나가는 아줌마의 유모차에 몰래 태운다. 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는 찰리, 경찰관이 나타나자 냉큼 아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커피포트로 젖병을 만들어 아이 입에 물리고 나란히 옆에 앉아 침대시트를 잘라다 기저귀를 만드는 찰리, 경제적 능력은 없지만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동정심을 샘솟게 한다. 곧 개봉할 영화 <아이 엠 샘>에서 어린 딸을 돌보는 지체장애인 아버지 숀 펜의 모습에서도 <키드>의 채플린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 엠 샘>은 <키드>처럼 코믹하지 않지만 <키드>로부터 각인된 유전자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아이를 지키려는 찰리와 숀 펜의 노력은 번번이 편견과 오해의 벽에 부딪혀 위기에 처한다. 20세기이건 21세기이건 사회는 자기 잣대로 낙오자라고 판단한 자에게 가혹하고 냉담한 처벌을 서슴지 않는다.

‘모던 타임즈’의 본질을 포착하다

스크린에서 찰리는 억세게 운이 없는 사내였다. 그것은 <모던 타임즈>의 한 대목을 떠올려보는 걸로 충분히 수긍할 만한 사실이다. 공장에서 너트 죄는 일을 하다 신경쇠약에 걸려 정신병원에 갔다 나온 찰리, 지나가던 트럭에서 떨어진 깃발을 주워든다. 때마침 찰리 뒤에 따라붙은 시위행렬, 찰리는 주동자로 몰려 경찰에 체포되고 억울한 감옥생활을 감내한다. 장진의 <기막힌 사내들>에서 번번이 살인현장 근처를 배회하다 잡혀들어가는 억울한 남자 손현주나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에서 사소한 불운에서 심각한 불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고가 지지리 재수없는 찰리의 소동극을 닮은 것은 단지 우연일까? 찰리의 고단한 삶은 전쟁과 대공황의 시대, 차가운 도시의 질서를 벗어나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수난은 금광을 찾아 알래스카를 찾은 사람들을 그린 <황금광시대>에서 하나의 정점을 보여준다. 눈보라 속에 갇혀 허기에 지친 찰리가 자기 구두를 삶아먹는 장면은 벗어놓은 낡은 구두를 그린 고흐의 유화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찰리는 구두끈을 스파게티 감아올리듯 말아 입에 넣고 구두 밑창의 못을 생선가시처럼 발라내며 맛있게 구두를 먹는다. 오랜 방랑에 지쳐 잔뜩 주름이 잡힌 구두 한짝이 그렇게 사라지는 순간, 웃음은 굶주림이라는 현실을 잊는 마술을 부린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역설적이지만, 한편의 희극을 창조함에 있어 그 희극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이용되는 것은 비극성이다. 희극성이라는 것이 반항적인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전지전능한 자연 앞에 선 우리의 미약함을 발견하고 취할 수 있는 대처수단이란 웃음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비극과 희극의 관계에 대한 채플린의 통찰은 코미디의 경전에 실릴 만한 것이지만 누군가의 가르침이 만든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면과 어머니의 정신이상 속에서 허기와 외로움과 싸웠던 경험이 그의 작품 곳곳에 슬픔의 수원지를 마련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본능적으로 찰리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섰다. 경찰관, 공장 감독관, 귀부인, 부자는 그의 천적이었다. 채플린은 1918년에 쓴 <어떻게 관객을 웃길 것인가?>라는 글에서 “연극무대에서 가장 먼저 깨우친 것 가운데 하나는 일반 관객은 부유층한테 가장 고약스런 역할이 맡겨지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난한 90%의 사람들이 은연중에 나머지 10%의 부를 시기하기 때문”(<찰리 채플린: 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에서 재인용)이라고 썼다. 실업과 기아가 범람하던 시절, 관객은 그들 자신의 궁핍함과 허기를 찰리와 함께 나누며 위안을 얻었다. 전후 일본에서 야마다 요지의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가 대성공을 거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찰리가 빈자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이었다. 미국이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인 1952년, 채플린은 미국을 떠났고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은 1972년까지 20년간 미국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채플린이 공산주의에 끌려 <모던 타임즈>처럼 과격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대한 독재자>의 조감독을 맡았던 작가 댄 제임스는 이렇게 썼다. “그는 마르크스를 읽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과연 그 모든 것의 사회학적 의미를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포착’했다.” 채플린을 ‘천재’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경험이 낳은 교훈만으로 사회와 정치를 간파하는 혜안이 있었다. 한번도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않고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했던 그 재능이 그대로 발휘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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