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다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갖기는 그런, 또는 어떤 상황으로 그렇게 돼버린 남자들과 대체로 이성친구가 되는 것 같다. 이런 친구들과는 서로의 애정관계에 대해서 조언하고 파트너를 구해주기도 하면서 "둘 다 몇살까지 결혼 못하면 우리끼리 해결하지 뭐" 하는 시덥잖은 농담도 곧 잘한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마이클과 줄리언처럼.
그런데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여자친구들과는 다른 이상한 딜레마가 있다. 한달 열흘 동안 같은 침대를 써도 별일 없을 것 같은 사이였건만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결혼할 친구야”라고 떡 하니 여자를 소개하는 순간 그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것도 푹 찌그러진 찹쌀 도넛이 마술봉을 한대 맞고 갑자기 삼단 생크림 케이크로 변하는 것처럼 멋진 왕자님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어제까지 전화로 듣던 목소리는 틀림없이 개골개골이었는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말은 우아하게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듣고 흘렸던 정보의 조각들이 그제야 띠리릭 재구성된다. 그리고 애써 버그가 될 만한 구석을 찾느라 눈은 가자미의 그것이 된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봐도 게임이 안 된다. “야, 이 좌∼식아”라고 똥개 부르듯 내가 부르던 후줄근한 남자에게 “오빠, 오빠”를 외치는 그 여성분은 아직도 솜털 뽀시시한 이십대 중반이고, 당근 외모 출중하다. 물론 내 남자친구의 결혼상대자 가운데 키미처럼 구단주 아버지를 둔 사람은 없었지만 뭐 하나 나보다 빠지는 게 없다. 심지어 인품에서까지 뛰어난 경쟁력을 자랑한다.
“정말 축하해. 잘해줘라” 말하지만 정말은 실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잘해주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한다. 평소 같으면 약속 1시간 전에 취소 연락이 와도 “관둬라 그럼” 하던 기개는 사라지고 “10분 있다가 내가 다시 전화할게”라는 말 한마디에 가슴 한구석이 대포알이 지나간 흔적처럼 뻥 뚫린다. 내가 왜 이 보석을 옆에 두고 발견하지 못했는가 땅을 치다가 급기야 실은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줄리안처럼 결혼을 코앞에 둔 남자친구에게 실제로 사랑을 고백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줄리안이 결혼식장에서 마이클에게 사랑을 고백한 건 잘한 일이었을까 줄리안이 줄리안이었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주변 인물이었다면 ‘웬 추태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원한다면) 빨리 가서 사랑을 고백해라”고 말하는 조지의 편이다. 물론 조지도 줄리안도, 그리고 나도 그 고백이 먹혀들어 사태가 반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평생 “그때 내가 고백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막연한 궁금증을 묻고 사는 것보다는 저지르고 거절당하고 정리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줄리안은 마이클을 정말 사랑했던 것일까 그건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그것이 감당할 만한 진실을 담고 있다. 설사 남주기 아까운, 곱지 않은 심보에서 출발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마 줄리안의 사랑에는 둘이 함께 보낸 시간들, 지나가버린 자신의 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무데뽀처럼 보이는 줄리안의 사랑 고백은 정지된 채로 가슴에 머물러 있던 시간을 떠나보내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