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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누마 고우의 <트윈 스피카>
2002-10-17

아직도 별을 꿈꾸는 당신에게

서기 2024년,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한 소녀의 이야기. 과연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우리의 만화적 상상력을 빌려보자. 이미 두어번 외계의 침공을 받아 황폐화된 지구, 수백층 고층 빌딩 사이에서 튀어나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비행정, 명왕성을 지나자 은빛 날개를 접고 웜홀을 통해 은하 저편으로 순간이동하는 거대 로봇…. 하지만 이처럼 상식적인 미래에 대한 우리의 추측은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 만화는 미래와 그것이 가져올 눈부신 변화가 아니라, 그때쯤에는 당연히 사라져야 마땅할, 그래서 그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한 과거의 꿈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 <트윈 스피카>(ふたつのスピカ, 세주문화 펴냄)는 신예 만화가 야기누마 고우(柳沼行)가 잡지 <코믹 플래퍼>(Comic Flapper)에 연재하고 있는 작품이다. 야기누마는 데뷔작 ‘2015년에 쏘아올린 폭죽’과 그뒤의 단편들에서 일본 최초의 유인우주탐사로켓 ‘사자호’의 추락으로 어머니를 잃은 소녀 ‘아스미’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연작으로 이어져온 단편들이 인기의 탄력을 얻자 그녀가 15살의 나이로 성장해 우주학교에서 비행사 훈련을 쌓아가는 이야기로 본격적인 연재에 들어가게 되었다(아스미의 어린 시절을 그린 단편들은 단행본 각권의 뒤쪽에 나뉘어져 실려 있다).

미래 배경에 과거의 꿈을 펼쳐 놓다

이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은 10∼20년 이상의 미래이지만, 공간의 분위기나 인간들의 모습은 아폴로가 달나라에 날아가고 있던 1970년 전후로 느껴질 만큼 복고적이다. 가끔씩 미래를 느끼게 해주는 기계장치들이 없지는 않지만 장식적인 효과도 분명히 내지 못할 만큼 불분명하고, 시골 풍경이나 더러운 기숙사와 같은 세부묘사는 확실히 과거 지향적이다. 아스미가 다니는 ‘우주학교’는 <해리 포터>식의 모호한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듯도 하다.

전작인 단편들에서는 우주선의 추락으로 어머니를 잃은 6살가량의 아스미, 우주 비행사였다가 지금은 유령이 되어 사자 가면을 쓰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라이온, 라이온의 옛 연인이며 아스미의 선생님인 스즈나리, 그리고 사고의 상처로 슬픔에 빠져 있는 아스미의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의 뒤틀린 관계들을 풀어가는 회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만화의 서정은 자욱하게 깔려 있는 슬픔의 안개 위로 반짝거리며 솟아오르는 반딧불의 희망을 보여주고, 라이온을 중심으로 동화적인 느낌을 자아내 다분히 판타지적인 색채가 강하다. 단편으로서 충분히 어필할 만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연재로 들어가면서 조금은 다른 전략을 찾아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주학교’라는 설정 속에 아즈미를 비롯해 개성 강한 소년 소녀들이 모여든다든지, 그들이 힘든 과정을 통해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든지, 악의를 가진 선생을 통해 아버지의 과거에 연관된 태생의 콤플렉스를 드러낸다든지 하는 등 다분히 동시대에 유행하는 소년물의 설정이 채택된다. 그림도 훨씬 세련되어지고, 단편의 오밀조밀한 칸 나눔을 벗어나 과감하고 시원스럽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중요한 지점마다 독자들을 놀라게 하거나 큰 쾌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연출의 장치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프로페셔널해진 것이다.

사실은 전작 단편들에서도 신진의 냄새를 별로 풍기지 않을 정도로 만화가 야기누마의 기본기는 충실하다. 아주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성실하고 좋은 질감의 그림체를 가지고 있고, 연필 데생의 느낌이 나는 입체의 묘사는 고전적인 풍성함을 준다. 꼼꼼한 그림 칸은 다소 설익어 보이지만 만화의 따뜻한 서정과는 잘 어울린다. 본 연재로 들어가 확실한 프로 만화가의 가치를 보여줄 단계에서도 야기누마의 그림은 매우 잘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작품 컨셉에 담긴 약간의 메이저 전략을 상쇄시킬 만큼 작품 전체에 깃든 따뜻한 서정의 힘은 강하다. 이런 만화가에게 단편의 동화적인 판타지 색채를 유지해달라고 하는 것은 소수의 사치스런 요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복고적 감성, 그러나 단단한 힘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인기의 과실을 따먹으면서 서서히 본연의 질을 잃어갔던 몇몇 안타까운 선례를 따라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스미의 복고적인 캐릭터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변 친구들의 설정은 다소 안이하다. <탐정학원 큐> <유희왕> <원피스> 등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소년물의 인물 배치와 엇비슷한 면모를 보이면서, 오히려 덜 섬세하게 구사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당대 소년 소녀들의 감수성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주인공들의 모습은 오히려 이 만화가 30대 이상, 그러니까 아폴로의 달착륙에 열광했던 그 소년소녀들을 위한 만화라는 생각도 가지게 한다. 물론 그때 그 시절의 감성을 함께 나누었지만 점차 그 꿈들이 속절없이 퇴색되어가는 과정을 보아온 어른들에겐 과 같은 반성적이고 역전적인 드라마가 더 마음이 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위험을 알면서도, 이 만화가가 가진 단단한 힘을 느끼기에 지금은 조용히 마음속의 박수를 치며 다음 편을 기다리고 싶다. 우리가 아무리 세련되어졌다 요란을 떨어도, 하늘의 별은 여전히 그 변함없는 빛으로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을 테니.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