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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카쓰 로망 포르노-70·80년대 일본 고품격 에로영화
2002-10-18

아름답네,젖은 욕정의 세계

에로영화는 저급하거나 지루하고 식상하다는 편견은 이미 오래 전에 깨졌다. 한 명의 거장이나 모든 규칙을 뛰어넘는 위대한 걸작 하나로 무너진 것이 아니다. 71년 시작된 닛카쓰 로망 포르노는 ‘에로’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성을 중심에 놓고 인간과 사회, 역사와 우주까지 신랄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로망 포르노는 수많은 거장과 걸작을 탄생시켰다. 구마시로 다쓰미, 다나카 노보루 등 성애영화의 거장들이 탄생했고 모리타 요시미쓰, 나카하라 준, 히가시 요이치 등 80년대 일본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끈 젊은 감독들은 로망 포르노로 영화를 시작했다.

TV의 등장으로 휘청하던 일본의 메이저 스튜디오 닛카쓰는 70년대 들어 도산 직전의 상황에 몰렸다. 닛카쓰는 전속이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을 거의 포기하고, 영화 제작도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 닛카쓰는 돌파구를 ‘에로’영화에서 찾았다. 60년대에 성행했던 싸구려 핑크영화보다는 3, 4배의 제작비를 들이고, 닛카쓰의 우수한 스탭과 촬영기재, 세트를 이용하여 고품격 에로영화를 만들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기성 감독들 대부분은 에로영화가 저급하다며 연출을 거부했고 자연스럽게 조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 등의 젊은 인재들이 빠르게 감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렇게 출발한 에로영화들은 70년대를 휩쓸었고, 닛카쓰 로망 포르노로 불리기 시작했다. 72년 만든 구마시로 다쓰미의 <이치조 사유리 젖은 욕정>은 성인영화 최초로 영화잡지 등에서 뽑은 각종 ‘베스트 텐’에 오르며, 로망 포르노의 거센 물결을 알렸다. 80년대 이후 AV의 출현으로 로망 포르노의 시대는 저물고 극히 저예산의 핑크영화가 명목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비디오 시장의 확대로 메이저 영화사의 자회사와 독립 프로덕션이 V시네마를 만들게 되고, V시네마의 한 장르로서 로망 포르노의 후예들이 명맥을 이어간다.

올해 광주영화제에서는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대표적인 거장 구마시로 다쓰미와 다나카 노보루의 작품이 소개된다. 이 작품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등뼈를 찬찬히 짚어보는 정도는 된다. 식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인 성에 관심이 있는 ‘성인’이라면 필견!

● 구마시로 다쓰미 ●

<이치조 사유리-젖은 욕정> 條さゆり 濡れた欲情

감독 구마시로 다츠미 ┃ 출연 하기오 나오미, 이사야마 히로코, 시라가와 가즈코, 아와즈 고 ┃ 1973년 ┃ 일본 ┃ 69분

닛카쓰 로망 포르노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 로망 포르노가 장르로서 정착하고, 영화적으로 공인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사카에서 은퇴공연을 벌이다가 외설죄로 체포된 스트리퍼 이치조 사유리의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영화는 사유리의 공연에 함께 나가게 될 하루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루미는 기둥서방을 이용하여 사유리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되기를 원한다. 사유리의 은퇴공연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이 주인공이 될 기회를 노린다. 마치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 듯 초월적인 표정으로 스트립을 보여주는 사유리와 달리 성공에만 집착하는 하루미는 언뜻 보기에 사악하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행동에는 순진함이 어려 있다. 거리장면과 뉴스릴 등을 이용하여 환락의 세계를 일상의 세계와 병렬시키고 관음증을 탈색시키는 구마시로 다쓰미의 연출이 돋보인다. 화류계 여성들에게 대단한 연정을 과시하는 구마시로 다쓰미의 작품세계가 시작된 작품이다.

<다다미방의 이불속-게이샤의 세계> 四疊半 の裏張り

감독 구마시로 다츠미 ┃ 출연 미야시타 준코, 에스미 히데아키, 아와즈 고, 에자와 모에코 ┃ 1973년 ┃ 일본 ┃ 72분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대표작. 다이쇼 시대 기생들의 세계를 치밀하고 농염하게 그려냈다. 기생인 유코의 손님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이야기보다는 개개의 사건과 풍속 묘사에 특히 공을 들이고 있다. 다다미 4조반이라는 좁은 방 안에서 진행되는 남녀의 세계에 카메라를 극히 밀착시키면서도, 시대의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전쟁을 위해서 총검술을 훈련하고, 결국 전쟁터로 떠나는 애인을 둔 기생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방황하는 연인들> 戀人たちは濡れた

감독 구마시로 다츠미 ┃ 출연 오에 데츠, 나카가와 리에, 에자와 모에코, 게이 치로 ┃ 1973년 ┃ 일본 ┃ 76분

‘젖었다’ 시리즈의 1편. 어촌을 무대로 이름과 과거와 미래 모든 것을 버리고 영화관의 필름을 나르는 청년의 허무한 나날을 그리고 있다. 혁명의 불꽃이 사라지고 얼음폭풍이 휘몰아쳤던 70년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초상을 쓸쓸하게 담아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바라보고, 바보처럼 보이는 청년의 나날에 조소도 던지지만 그를 어루만져주는 여인의 손길처럼 차츰 고통과 슬픔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음울한 바다를 뒤로 한 채 모래 위에서 하나씩 옷을 벗고 뛰어 노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히고, 마침내 슬퍼진다.

<빨간 머리의 여자> 赫い髮の女

감독 구마시로 다츠미 ┃ 출연 준코 미야시타, 렌지 이시바시, 아코, 모에코 에자와 ┃ 1979년 ┃ 일본 ┃ 73분

닛카쓰 포르노가 낳은 명작 중 명작이며 구마시로 다쓰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남자는 강간도 태연하게 저지르는 저질 인간이다. 어느 날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여인이 빗속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을 보고는 태워준다. 그날부터 여자는 남자의 집에 머무른다. 서로에게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는다. 남루한 방 안에서 남녀는 황량한 섹스를 되풀이한다. 그들은 더이상 젊지 않다. 중년으로 접어든 몸은 이제 정체해 있다. 그 몸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성애를 갈구한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그들은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남자는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그녀를 때리기도 하지만 결코 헤어질 수는 없다. 버릴 수도 없다. 그들은 함께, 극단적인 파괴의 순간까지 함께 가야만 한다. <빨강 머리의 여자>에서 비가 쏟아지는 공간은, ‘일본영화의 독자적인 색채와 질감을 필름에 정착’시킨 증거라고 평가된다. 닛카쓰 로망 포르노가 낳은 스타의 하나이며, 성애의 화신이었던 미야시타 쥰코의 연기가 특히 훌륭하다.

● 다나카 노보루 ●

<실록 아베 사다> 實錄阿部定

감독 다나카 노보루 ┃ 출연 미야시타 준코, 에스미 히데아키, 하나야기 겐슈 ┃ 1975년 ┃ 일본 ┃ 76분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과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그려낸 영화. 1936년에 벌어진 아베 사다 사건은 좁은 방 안에서 오로지 섹스를 탐하다가, 마침내 남자의 목을 조르고 성기를 잘라 도망친 엽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나카 노보루는 일본영화 특유의 장르라 할 ‘실록’풍으로 그 사건을 파고든다. 36년 아베 사다 사건 3개월 전에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2·26 사건이 있었고, 두개의 사건은 당대의 키워드로서 언제나 묶어서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다나카 노보루는 그것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사다가 남자의 몸에 칼로 새긴 ‘사다, 요시 두 사람이 통했다’라는 의미에만 철저하게 집착한다. ‘바깥의 빛이 싫어’라며 오로지 죽음에 이르는 섹스에만 집착했던 두 사람을 그려내는데, 오시마 나기사와 다른 것은 탐미적인 시선이 근저부터 거부된다는 점이다. 어릴 때 팔려가서 계속 남자들의 노리개가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 목을 졸라 살해한 사다의 심정이 애절하게 그려진다. 로망 포르노의 열 손가락에 꼽히는 수작.

<다락방의 산보자> 江戶川亂步獵奇館 屋根裏の散步者

감독 다나카 노보루 ┃ 출연 미야시타 준코, 이시바시 렌지, 초 히로시 ┃ 1976년 ┃ 일본 ┃ 76분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 원작의 엽기적인 소설을 각색했다. 하숙집의 다락방을 밤마다 배회하며 구멍을 통해 타인의 생활을 엿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하숙집의 주인인 귀부인이 섹스를 벌이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귀부인은 그가 엿보는 것을 알고 있다. 날마다 타인을 엿보던 남자는 기묘하고 고독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며 쾌락을 추구한다. 어느 날 귀부인이 남자를 불러들이고, 남자는 극단적인 살인욕망으로 치닫는다. 엿보는 자와 엿보기를 당하는 자의 기묘한 게임은 다이쇼 시대의 데카당스한 미학을 탁월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김봉석/ 영화평론가

이시이 다카시 각본 작품들살아 있음의 표식에 매혹되다

이시이 다카시는 70년대 최고 만화가의 하나이며, 80년대 이후 폭력과 섹스의 세계를 독특하게 그려낸 <죽어도 좋아> <누드의 밤> <고닌> <검은 천사> <프리즈 미>를 만든 영화감독이다. 극단적인 폭력과 섹스를 묘사한 만화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이시이 다카시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자신의 만화 원작인 <천사의 내장> 시리즈를 직접 각색하면서 어린 시절부터의 꿈인 영화계로 뛰어들었고, <천사의 내장> 5편을 만들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광주 영화제에 소개되는 <천사의 내장 붉은 교실>은 시리즈의 2번째 작품이고, <러브 호텔>은 원작없이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이시이 다카시가 애용하는 주인공 이름인 ‘무라키’와 ‘나미’가 등장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인 정서와 슬픔이 짙게 깔려 있다. 공교롭게도 연출을 맡은 소네 츄우세이와 소마이 신지는 인물의 감정을 유장하게 끌어내는 원신 원컷을 장기로 하는 감독들이다. 극단까지 파고들어가는 이시이 다카시의 작품세계가 짙게 투영되어 있는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 天使のはらわた 赤い敎室

감독 소네 츠세이 ┃ 출연 가니에 게이조, 미즈하라 유키 ┃ 1979년 ┃ 일본 ┃ 79분

이시이 다카시가 직접 각본을 쓴 첫 작품.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포르노 잡지사의 편집자인 무라키는 우연히 본 포르노영화의 주인공인 나미에게 한눈에 반하여 수소문한다. 겨우 나미를 찾아내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고 다시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약속한 날, 경찰이 들이닥쳐 무라키는 약속장소에 나가지 못한다. 다시 나미를 만나지 못한 채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술에 취해 뒷골목을 헤매다가 우연히 들어간 술집. 그곳에 나미가 있다. 그러나 3년 만에 만난 나미는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있다. 소네 츄우세이가 잡아내는 정사장면은 원신 원컷으로, 마치 육체를 조심스럽게 절개해 나가는 것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어간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의 묘사가 아니라, 육체에 새겨진 상처와 고통, 황량한 마음까지 담아내는 것이다. 불안정한 구도와 영상을 최대로 활용하여 인물의 감정을 그려낸 걸작.

<러브 호텔> ラブホテル

감독 소마이 신지 ┃ 출연 하야미 노리코, 데라다 미노리, 시미즈 기로코, 만다 히사코 ┃ 1985년 ┃ 일본 ┃ 88분

<세라복과 기관총> <태풍 클럽> 등을 만들어 80년대 뉴 웨이브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꼽히는 소마이 신지의 유일한 로망 포르노. 하지만 닛카쓰에서 만들지는 않았다. 경영하던 회사가 도산하고 부인까지 야쿠자한테 범해진 무라키.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져버린 무라키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러브 호텔에서 여자를 부른다. 폭력적으로 나미를 대하던 무라키는 어느 순간 그녀의 관능, 살아 있음의 표식에 매혹된다. 그리고 도망쳐버린다. 죽지 않고 택시 운전사로 일하던 무라키는 2년 뒤 다시 나미를 만난다. 사랑이 시작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시이 다카시의 각본은 비정한 세계에서 파괴된 남과 여를 극단적으로 그려낸다. 소마이 신지 특유의 느린 화면이 독특한 리듬감으로 관객을 취하게 만든다. 두 여인이 가파른 계단의 위와 아래에서 뒤돌아보고, 그 위로 벚꽃이 휘날리는 마지막 장면은 지극히 인상적이다. 배경음악은 80년대 최고의 스타인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른 <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