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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감독 가상인터뷰(2)
2002-10-18

비로도 마스크 사나이의 피가 끓는다

그럼, 800여명의 엑스트라를 모았던 것도 스펙터클을 제공하겠다는 판단이었나요.

= 그렇지. 농민들이 <풍년가>를 부르며 춤추는 장면인데 초라하게 찍긴 싫었어. 고집피웠지. 하루에 1원씩 준답시고 800명을 모았어. 근데 통솔이 돼야지. 오전에 집합해도 의상이 튀는 사람들 골라내려면 반나절이 후딱 가는데. 어찌해서 군중을 십여대(隊)로 나눈 다음 한숨 돌리는데 불현듯 기발한 착상이 떠오르는 거야. 춤추려면 머쓱할 것 아닌가. 그래서 술과 술국을 돌렸어. 그게 화근이 될 줄 알았나. 공술인데 한잔 걸치고 물러날 사람이 있었겠어. 누군 코골고 자고, 어디는 주먹다짐이 오가고 난장판이 됐지. 그때 이명우군이 국솥에다 모래를 뿌리기까지 했는데도 그치질 않더구만. 해는 벌써 기우는데 난 나대로 목이 쉬고 가슴이 미어지고. 느지막이 자동차 타고 왔던 전주(錢主)는 그 광경을 보고 발을 구르지. 찍지 못하면 하루 1천원을 고스란히 날려야 하니까. 그러던 참에 참다못한 단성사 사람들이 중간에서 고깔 쓰고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냈어. 난무였는데도 자연스러워 좋았지.

연기를 위해서였다지만, 촬영 전에 술은 좀…. 가끔 기발함이 지나쳐 엽기적인 발상도 곧잘 하신 것 같습니다.

= <들쥐> 때 이야길 들었군. 첫 장면의 이메지는 쥐 500마리와 괭이 한마리의 사투, 뭐 그런 거였지. 자, 쥐 한 마리에 일금 10전씩 주겠다. 일단 전단부터 써붙였어. 하루 평균 80마리씩 들어온 거 알어 나중엔 처치가 곤란할 정도였어. 할 수 없이 목욕통에다 넣어서 보관했지. 미물이라도 먹을 것은 챙겨줘야지 싶어 쌀도 조금 넣어두고. 그런데 그 다음날 지네들끼리 박터지게 싸우다 전부 죽어버린 거야. 공상으로 끝나버린 거지.

그 장면이 빠져서 흥행이 안 됐나보군요. 조선키네마프로덕션과는 <금붕어>(1927)까지 하고 단성사의 박승필과 손을 잡는데요.

= 요도 도라조오도 명색이 모자를 팔던 장사꾼 아닌가. <들쥐>가 흥행에 실패하자 실망하는 눈치더군. <금붕어> 때는 개봉할 때 입장객한테 금붕어 한 마리씩 넣은 어항을 선물로 건네주는 등의 홍보 전략도 좀 썼고, 어쨌든 제작비의 5∼6배를 벌었어. 그런데 사이가 예전처럼 복원되진 못했지. 안정적인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 그 무렵 박승필에게 미리 대본을 보내는 등 거래를 개시했어. 서울 창신동에 곧장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낌새를 채고 준비를 해둬서야.

나운규 프로덕션은 그러나 2년을 넘기지 못했잖습니까. <벙어리 삼룡>(1929)을 끝으로 문을 닫았는데요.

= 남들은 나보고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지만, 무슨 꿍꿍이 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돈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거지.

사업에의 무관심, 그리고 동료들과의 갈등에는 여자… 문제도 작용하지 않았나요.

= 그리 말하면 쓰나. (담배 한대를 손가락 깊숙이 끼워넣으며) 변명하자는 건 아니고…(중략)… 맘에 드는 이가 있으면 재지 않고 홀딱 반하는 기질 같은 게 있나봐. 선천적인 감성인지, 함경도 출신의 기질 탓인지. 다정다감하면서도 곧잘 다혈질이었는데도 따라다니는 여인들이 꽤 많았어. 동료들과의 갈등은 피차일반이고.

당시 배우들은 기생들이 한약을 다려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만. 용두동 촬영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사건은 어찌된 겁니까. 단역배우만 해도 200여명이나 불러놓고서.

= 내 이름 걸고 나섰는데 <잘있거라> <옥녀> 등이 참패했지.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어. 급작스런 추락을 견딜 수 없었지. 그때 만난 사람이 오춘선이었네. 인천의 이름난 기생이었는데 난(蘭)도 곧잘 치고 지적인 사람이었지. 뭣보다 시름에 빠진 날 이해해줬어. 그녀와 유흥하느라 돈을 꽤 썼는데, 불란서제 발보였는지, 미국제 유니버설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도 카메라까지 저당잡혔으니 동료들에겐 못할 짓이지.(담배를 연신 꺼내 무는 선생의 양볼은 흉할 정도로 패 있는 것이 여전하다.)

담배를 너무 많이 태우시는 것 아닌가요.

= 나처럼 몰취미한 인간이 이거 아니면 소일거리가 있을라구. 술은 한잔도 못 먹지, 장기나 바둑, 골프, 마작 할 줄 아는 게 없어. 담배만은 그래도 내가 대장이지. 흡연가 대경연회가 있다면 1등은 일찌감치 따논 당상이야.

주먹도 곧잘 쓰신 것으로 아는데요.

= 유도를 잘한다는 말이 있긴 했는데, 그건 소문이고.(웃음) 대정 13년(1924)이었나.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있을 땐데 일본인 고좌(高佐)가 여배우인 이채전을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려고 하는 거야. 다급한 김에 냅다 눈에 뵈는 의자로 후려갈겼다고. 그런 일이 있은 뒤, 그 광경을 지켜본 윤백남, 이경손 등과 함께 상경해서 윤백남프로덕션을 차렸지. <오몽녀> 찍을 때도 그런 적이 있었네. 로케를 강원도에서 하는데 전기가 없어 무작정 끌어다 썼더니만 전기회사 직원이 쫓아와선 잔소리를 하는 거야. 어쭈, 이 놈 봐라 싶어 한방 먹여줬더니만 이번엔 일본인 형사가 나타나더라고. 촬영 없어졌겠다, 이번엔 스탭들이 그를 혼내줬어. 분풀이는 좋았는데, 그 일로 전원 연행됐지.

데뷔는 ‘배우’였습니다. 유년 시절의 ‘꿈’이었는지요.

= 16살 때였나. 아버지가 하루는 ‘오늘은 학교가지 마라. 결혼하는 날이다’라고 하시드만. 내 놀래서. 두루마기 입혀서 당나귀 위에 올려앉혀졌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그래서 첫날밤 밤중에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냅다 (윤)봉춘의 집으로 튀었어. 고집을 좀 피웠더니만 부모가 손들더라고. 자식 이기는 부모 봤나. 그때부터 봉춘의 집에서 이상한 동거를 시작했어.(웃음) 아내는 홀로 두고. 그 무렵 회령의 만년좌라는 극장에서 내가 쓴 각본으로 봉춘, 그리고 윤마리아를 배우 삼아 극을 올리는 걸 재미삼았어. 그러다 1923년인가. 함흥에서 발족한 극단 예림회가 회령 공연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문예부장이던 안종화에게 좀 데려가달라고 했지. 정식 무대에 서보긴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러다 예림회가 해산되고 나서 안종화는 무대예술연구회 결성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고, 1년이 넘어서야 서울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나게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