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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감독 가상인터뷰(1)
2002-10-18

비로도 마스크 사나이의 피가 끓는다

“농민들이 <풍년가>를 부르며 춤추는 장면인데 초라하게 찍긴 싫었어. 고집피웠지. 하루에 1원씩 준답시고 800명을 모았어. 근데 통솔이 돼야지. 오전에 집합해도 의상이 튀는 사람들 골라내려면 반나절이 후딱 가는데. 어찌해서 군중을 십여대(隊)로 나눈 다음 한숨 돌리는데 불현듯 기발한 착상이 떠오르는 거야. 춤추려면 머쓱할 것 아닌가. 그래서 술과 술국을 돌렸어. 그게 화근이 될 줄 알았나. 공술인데 한잔 걸치고 물러날 사람이 있었겠어. 누군 코골고 자고, 어디는 주먹다짐이 오가고 난장판이 됐지.”

약조를 받아내기까진 그닥 어렵지 않았다. 선생도 적적했으리라. 생자(生者)와 면한 지도 벌써 육십년이 훌쩍 지나지 않았나. 뵈올 수 있냐는 간청을 올렸을 때 선생이 종로통 옆골목에서 선술 팔던 ‘납작집’에서 보자고 흔쾌히 기별을 준 것만 봐도 그랬다. 더구나 그곳이 어떤 곳인가. 음주를 즐겨하지 않는 그이지만, 활동사진 박는답시고 어울려 나섰던 친우들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 아닌가. 취기를 빌려 하루는 환호를, 또 하루는 울분을 토해내던 일이 빈번하던 시대였으니. 선생이 그곳을 택한 것은 어쩌면 뭔가를 잔뜩 일러주겠다는 귀띔일지도 모른다.

약속 당일. 선생은 이미 구석에 자리하고 계셨다. “젖 먹는 강아지 발 뒤축 문다”고. 새파랗게 젊은 놈이 미리 와서 조아리지 못한다는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운 마음부터 들었다.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었으나, 그날따라 덜컹거리는 소리는 그리 크던지. 다행히 선생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외양은 변했으나 허름하긴 매한가지인 선술집이었다. 여기저기 그을린 탁자 위엔 그의 상징이기도 한 회색 중절모가 올려져 있었고, 이미 탁주 한 사발이 곁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날이 쌀쌀해져서일까, 아님 먼길 떠나오신 탓일까. 어쨌든 몸 데우고, 목 축일 방편으론 그만한 것도 없다는 데 생각이 가닿았다.

마스크는 안 하고 오셨네요.

= 어. 이젠 갑갑해서스리. 잘 안 하고 다니지.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하니.

‘비로도 마스크’! 선생님을 칭하는 별명이기도 했잖습니까.

= 폐가 나쁘지만서도 위생상 그랬던 건 아니고. 남들 앞에 내 얼굴 보이기가 싫어서. 그래도 내 작품 상영할 때 단성사 문전에서 암행(暗行)하던 재미보려면 이게 요긴했어. 나중엔 다 알아버려서 마스크 쓰고 가면 오히려 더 잘 알아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려고 달려드는 군중 때문에 욕 좀 봤지만.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은 <아리랑>(1926)으로 봐야겠죠. 이정숙씨가 <아리랑>의 후렴을 불러젖힐 때면 장내가 울음바다였다지요. 상영 8개월 만에 전국 100만명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있고. 변변한 조명기 하나없이 찍은 당시의 제작상황이 궁금합니다.

= 조명기가 있으면 또 뭐해. 세트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인데. 그때 우리가 로케 장소로 점찍은 곳이 안암골(현 서울 안암동)이야. 성 밖이라 전기가 들어올 리 만무하지. 그때만 해도 초가 10여채에 기와집이라곤 딱 한채밖에 없는 산골이었어. 또 황금정(현 을지로)까지야 전차 타고 오는데 그 다음부터선 두 다리에 의지해서 20리쯤 걸어야 돼. 그래도 여배우를 홀대할 순 없잖은가. 신일선이만은 내가 말해서 인력거를 태웠다고.

<아리랑>을 제작하던 때가 조선영화의 ‘위기’였다고 지적하신 적이 있는데요.

= 대부분 고대극이나 전설물 아니면 문학을 영화화했으니까. 어떻게 만들었든지 흥행에 다 성공했어. 신기한 활동사진에 조선 사람이 나온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모을 진귀한 구경거리였지. 그런데 1925년 정도에 가면 무서운 난관이 닥쳐. 할리우드의 서부활극들이 들어오고, 대작들이 무수히 양산됐던 건데. 그에 비해 조선영화는 따분하다는 불평이 슬슬 나오는 상황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