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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맞은 <아리랑>의 나운규,서른여섯해 삶과 영화세계(4)
2002-10-18

거대한 뿌리,거대한 아버지

<황무지> <오몽녀>, 하나의 정점!

나운규는 인간적으로도 곡절이 많은 사람이다. 바구니로 긁어 담을 만큼 돈을 벌 때조차 동료나 가족에 대해서 무책임한 행각을 일삼아 죽마고우인 윤봉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때로는 비굴한 모습을 암시하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나운규는 10여년에 걸친 영화활동에 획을 그을 만한 전혀 새로운 작품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에 나운규는 심혈을 기울여 <황무지>를 준비했다. 1936년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부전고원을 무대로 촬영하기 위해 현지 헌팅을 비롯한 촬영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나운규의 건강 이 이미 로케이션 촬영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와 친구들이 <황무지> 촬영을 극력 만류했다. 이에 따라 나운규는 <황무지>를 중단하고 <오몽녀>를 각색하여 영화를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 있는 <황무지> 시나리오에서 느껴지는 미학적 경향과 <오몽녀>에 대한 당시의 평을 합해보면 말년의 나운규가 도달한 지점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황무지>(<한국시나리오선집> 제1권 수록, 영화진흥공사 편, 1982)는 우선 극적 구성의 짜임새, 스토리가 함축하고 있는 사상적인 명료함이 눈에 띈다. 말년의 나운규는 흙에 귀속하는 계몽주의의 면모를 보이는데, 이것은 당시 정세로부터 기인하는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고향을 등지고 일확천금을 노리던 인텔리 청년 박이 장노인의 집에 정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여러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흥미롭게 풀어간다. 세련된 플롯에 군더더기 없이 흘러가는 스토리, 효과적인 대사가 인상적이다.

정서적으로는 따뜻한 시적 서정이 엿보인다. 순이와 박이 처음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의표를 찌를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모습을 점차 멀리 잡게 하는 트랙 아웃(track out) 효과를 통해 인물과 관객이 감정에 빠지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만든다. 몇몇 장면에서는 촬영기교와 미장센, 편집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박, 물끄러미 바라본다 - 걸어가는 순이, 차차 흐리게 보인다 - 눈물어린 박의 눈!” 같은 장면에서 보이는 시점 숏이 그 예다.

<오몽녀>에 대해 당시의 한 신문은 ‘표현이 침착하고 사물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며 소위 영화적’이라고 평했다. 반면 ‘화술을 너무나 절제한 것이 흠’이라거나 ‘냉혹하다’는 평가도 있다. 이를 종합해볼 때 <오몽녀>는 나운규의 전작들에 남아 있었던 신파적인 감정 과잉이나 민족주의적인 격정을 없애고 ‘냉혹’할 정도의 관찰, 그리고 당대의 눈높은 식자들이 구미와 일본의 최고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을 만한 어떤 깊이와 영화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오몽녀>가 보여주는 작품세계의 변화는 나운규 개인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영화 전체의 발전 방향이기도 했다. 이는 1925년에 영화화된 <심청전>(이경손)과 1938년에 영화화된 <한강>(방한준)을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심청전>은 우선 무성영화로서 그리피스 영화언어(Griffith codes)를 바탕으로 숏을 기본적인 표현단위로 삼고 있다. 정지된 정면 롱숏에서 다양하게 변화시킨 숏들의 심리적, 미적 기능을 이해하는 단계였으며, 영화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매우 강하다. 반면 <한강>은 카메라 기교에 대한 자의식적 과시는 사라진 대신 그것들의 심리적 효과에 정통하고 있으며, 한강 주변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일상적 삶을 천착하면서 당대 사회의 모순을 축조적으로 보여주는 기량을 발휘한다. 또한 캐릭터와 플롯이 세련되어 있고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1926년 <아리랑>을 통해 한국영화의 이념과 스타일을 구축했던 나운규는 이같은 전체 흐름과 맥을 같이할 뿐만 아니라, 1937년작 <오몽녀>를 통해 그 흐름을 적극적으로 선도하면서 스스로 그 새로운 경향의 정점에 올라섰다.

통렬한, 너무나 통렬한 엔딩

십여년 동안 나운규와 ‘붓쌈, 입쌈’을 벌이다가 나운규의 타계를 접하여 추도문을 쓴 서광제는 “그대의 예술을 이 지상에서 아주 모른다면 나같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한 안다면 나같이 잘 알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생전의 모든 잘못을 깊이깊이 용서하여 주고 어릴 때부터의 싸움동무를 잃은 나의 섭섭하고 울적한 심정을 잘 알아주고 깊이깊이 명복이 있기를 바란다. 끝”이라고 적었다. 전향한 좌파의 고백록이나 죽은 자에 대한 예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통렬하다. 지금 우리는 나운규에 대해 어떤 말을 더한 다음에 ‘끝’이라는 엔드 마크를 붙일 수 있을까.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