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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맞은 <아리랑>의 나운규,서른여섯해 삶과 영화세계(2)
2002-10-18

거대한 뿌리,거대한 아버지

스물넷, 열혈청년의 데뷔작

반항적인 성격에다 일찌감치 연애질에 빠져 학교를 쫓겨나다시피 했던 어떤 소년이 고향인 함경도 회령을 떠나 만주로, 러시아로 흘러다니다가 다시 조선으로 슬며시 숨어든 때가 대략 이 무렵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일찍 깨우쳤던 청년을 사로잡은 것은 영화였다. 형 나시규의 이름으로 대리 등록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밤낮으로 노트 한권 들고 극장에 들어가 메모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독립운동 전력이 들통나 2년간 옥살이를 했고, 1924년에 조선 최초의 영화제작사가 부산에 생겼단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부산으로 달려갔다. 거물 나운규가 <운영전>이라는 영화에서 가마를 들쳐멘 단역의 모습으로 우리 영화에 등장하기까지의 사연이 대략 이러했다.

1902년생, 그러니까 당시 스물네살이던 한 청년이 자신의 데뷔작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기 전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조선 극영화는 단 한편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말해야겠다. 마치 신기루처럼, 모든 것이 신기할 만큼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황야를 더듬거리기. 이것이 한국영화사라는 학문의 더할 나위 없는 아이러니다.

초기 영화사에서는 감독의 존재가 희미하다. 대신 카메라를 다루는 테크니션의 지위가 절대적이었다. 초창기의 한국 영화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카메라와 필름을 가졌지만 이걸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편의 영화가 된단 말인가 서양영화나 일본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치더라도, 조선인이 만든 조선의 영화란 어떤 형식과 내용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가 그걸 누가 가르쳐준단 말인가 천재가 탄생하는 지점은 늘 이런 식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아리랑>의 주인공은 전문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인텔리 청년 영진이다. 그는 정신이 이상해진 채로 고향에 돌아온다. 지주의 대리인인 마름이 여동생 영희를 집적거리는 장면을 보던 영진은 혼미한 정신 속에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면서 살인을 저지른다. 정신이 돌아온 채 경찰에 잡혀가는 영진을 마을 사람들은 <아리랑> 노래와 함께 눈물로 송별한다.

나운규는 여기서 당대의 사회구조를 개념적으로 구축한다. 일차적인 대립관계는 영진을 미치광이로 만든 제국주의 권력에 두고 이것을 매우 추상적인 비유로써 소화한다. 다음으로는 농민과 대지주라는 계급적 갈등관계를 띄워올리는데, 현실적인 갈등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일제라는 국가권력과 결탁한 대지주를 대리하는 마름, 곧 중간계급이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리얼리스트 특유의 거시적 감수성과 냉철함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나운규가 여성이라는 존재를 수난당하는 민족에 대한 알레고리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민족을 순결하고 고귀한 여성으로 상징화하고, 그 여성의 성적 수난을 지켜주지 못한 남성 자아의 자책감과 죄의식을 토로하는 이같은 플롯은 반일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반공, 반미,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진보 담론이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활용하는 서사구조다. 영화 안에서도 <오발탄>(유현목, 1961), <꽃잎>(장선우, 1996), <박하사탕>(이창동, 1999) 등에서 여전히 같은 틀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남성적 진보주의에 젠더라는 문제의식을 집어넣어 담론을 재형성하는 것은 죽은 나운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대 비평가의 몫일 것이다.

최초의 극영화인 <월하의 맹서>가 발표된 지 3년 만에 기적처럼 등장한 <아리랑>은 말 그대로 활동하는 사진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한국영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나운규는 또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주연 배우, 제작자를 겸했다는 점에서 영화에 대해 완벽한 통제권을 행사한 최초의 한국인 영화작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리랑>이 상영되는 곳은 “의열단 단원이 폭탄을 던진 것과 같은 열기가 감돌았다”는 등의 평가는 문헌이나 증언들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아리랑>은 일제시대 전 시기의 문화예술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생산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행면에서도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제1차 전성기를 유도했다.

이영일 선생은 <아리랑>이 한국영화의 내용과 형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최초의 거대한 답변으로 나타난 영화로서 내용적으로는 민족주의, 형식적으로는 리얼리즘을 정초했다고 평했다. 민족주의 리얼리즘은 그뒤로도 작품창작에서나 비평담론에서 정신적인 권위를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제 강점이 끝난 다음에도 전쟁과 미국의 영향, 군사독재 등 정치적 억압이 이어짐에 따라 작가와 평론가들이 최후의 저항선을 리얼리즘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아리랑>이라는 신화가 탄생한 저간의 사정이다. 신화는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사람들은 더이상 별을 쳐다보지 않는다. 아쉽게도 우리는 여기에서 대부분 멈추어 있다. 우리에게는 신화를 해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노력을 나운규 해석에 적용할 수 있을까. 단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리랑>이 오로지 민족주의를 아버지로 하고 리얼리즘을 어머니로 하는 혈통 엄격한 순종이기보다는 당대의 대중문화를 여러 가지로 흡수한 혼종이었을 가능성, 그리고 나운규 자신이 거룩한 리얼리스트로 평생을 일관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