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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윅, 정치와 신화
2002-10-18

<헤드윅> O.S.T

영화 <헤드윅>은 원래 성공한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이었다가 영화화되어 역시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는 <록키 호러 픽쳐쇼>와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영화의 형식은 <헤드윅>이 좀더 로큰롤 공연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이야기도 훨씬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이 세상에는 정치적 장벽과 성적 장벽이 있다. 하나는 큰 틀이고 몸 바깥에서 존재를 규정하며 다른 하나는 작은 틀이고 몸 안에서 몸들 자체를 구분한다. 그러나 정작 그 둘 모두는 일상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같을 수 있다. <헤드윅>은 성적 구분의 중요한 장치인 성기를 제거하는 행위가 얼마나 정치적인지 보여준다. 주인공 헤드윅은 그 제거를 통해 정치적 장벽을 상징적으로 넘지만, 벽은 끝없이 존재한다. 법적인 차원의 벽 너머에는 통념의 벽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4인치를 자르고 난 다음의 1인치만 남은, 성난 ‘1인치’로 세상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로큰롤은 무엇인가. 가장 소박한 의미에서, 로큰롤은 그런 사람들의 ‘자발적인 자기표현 양식’이다. 트럭 운전사 엘비스 프레슬리에게도, 버스 운전사의 아들 조지 해리슨에게도, 뉴욕 똘마니 루 리드에게도, 좀더 근본적으로는 슬라이드 기타를 농현하는 흑인 맹인 블루스 가수들에게도 로큰롤은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1인치’였다. 헤드윅에게도 정확하게 그렇다. 이 영화의 로큰롤은 아직도 철저하게 1970년대에 머물러 있다. 뉴욕 돌즈를 연상시키는 글램적 요소가 중심이고 사운드는 섹스 피스톨즈 사운드다. 록 사운드나 밴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이 영화는 일종의 ‘복고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큰롤의 의미 자체는 이중적이다. ‘자기표현 수단’의 자발성은 상업적이고 이기적인 팝문화의 침윤의 원천이기도 하다. 미국의 팝 문화는 늘 이 자발성을 상업적 착취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래서 한 세대의 광범위한 지지 자체가 팔린다. 미국의 팝 문화는 그런 방식으로 ‘의미’ 자체를 뒤집는다. 과연 무엇이 장삿속이고 무엇이 진지한 추구인가, 하는 고전적인 고민들을 무력화시킨다. 헤드윅이 가르쳐준 노래를 베껴먹어 스타가 된, 캐릭터상으로는 도어스의 짐 모리슨과 나인인치 네일스의 트랜트 레즈너의 짬뽕인 토미 노시스가 그 무력화된 자발성을 상징한다. 그는 헤드윅의 팝적인 분신이다.

공연장면과 현실, 동베를린의 과거, 환상을 자연스러우면서도 기묘하게 오가는 <헤드윅>의 노래는 모두 스티븐 트래스크가 지었다. 전체적인 구상은 물론 주인공이자 감독인 존 카메론 미첼이 했지만 노래말도, 가락도 모두 스티븐 트래스크의 것. 영화 속에서 토미 노시스로 분장한 사람이 바로 그다.

이 영화는 ‘모든 로큰롤러는 옳다’는 다소 순진한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남녀의 성적 구분이나 빈부의 구분이 없었던 ‘신화적 상태’를 이 영화는 동경한다. 신화적 상태는 자웅동체의 상태이다. 그 상태는 완벽한 상태인데,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역시 사랑의 힘밖에는 없다. 하긴, 로큰롤 공연 자체가 신화적 상태의 지속적인 일깨움이다. 그것은 너무 순진하여 의미가 발현되기 이전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관중은 그 ‘양수’의 상태 속에서, 그저 즐거이 비명을 내지르기만 한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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