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스텝 25시
<로드무비> 스틸 이보경
2002-10-23

길 위의 여행수첩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

이보경(30)은 가장 더러운 진창과 가장 정결한 나무를 모두 본 사람 같았다. 오지랖이 닳도록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드무비>는 그녀에게 맞춤 맞은 중간 기착지 같았다. 한여름 태백의 미시령 고개에서 시작된 3개월간의 여정에서 그녀는 가장 많은 수확물을 얻은 사람이었다. 서울역 고가도로와 신천 지하보도, 용산 전자상가, 청량리역, 서부 이촌동 육교, 청계천 3가와 4가 사이를 빠져나와 울진으로, 주문진항으로, 계화도 갯벌로 이동하는 그녀에겐 기억의 잔해가 낙엽더미처럼 남았다. 첫 작품 <유령>에서 10개월이나 청춘의 봄날을 내어준 그녀였기에 영화하면 우선 ‘지겹다’라는 생각부터 들었는데, 기간도 적당했다. 인기의 무게에 괜히 주눅들 필요 없었던 배우들과의 편한 랑데부도 한몫했다. 황정민이란 배우와 처음 만나던 날, 표범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구부정하게 휘어진 다리는 묘하게도 표범의 뒷다리를 연상시켰고, 헝클어진 머리와 땀냄새, 아래위로 까맣게 차려입은 등산복은 차라리 동물의 거죽이었다. 새침하게만 여기던 정찬은 오히려 직설화법으로 그녀를 무장해제시켰고, 가족 같았던 스탭들과의 동고동락은 영화를 찍는다기보단 오히려 ‘비싼’ 학예회를 준비하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 흑백과 컬러, 인물과 정경, 공간과 이미지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다. 감독은 그녀에게 본래의 카메라 구도, 세트, 조명과 함께 가되 독립적인 작업도 허락했고, 그래서 영화 장면의 복제판이 아닌 독특한 ‘여행수첩’이 만들어진 것이다. 짐짝처럼 차에 실려 일출과 일몰을 맞기 수십일, 어느새 여정의 시작이었던 서울역에 다시 돌아와 마지막 촬영을 마치던 날,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자신이 행운아임을 인정했다. 사진으로 밥 벌어먹고 살 날이 오리라 꿈에도 몰랐던 그 시절, 그저 호기심 하나로 시작한 이 일이, 천부적 재능이나 얄팍한 감각 따위로 쉽게 넘어지지 않는 산이란 걸 깨달으면서, 행운이란 없다고 부정해온 그녀였다. 계단을 오르듯 한 단계씩 쉬지 않고 밟아온 지난 십년의 시간동안 확고해진 건 ‘나에겐 이 길밖에 없던 건 아닐까’…. 다른 일엔 눈길 한번 준 적 없었고, 사람이 힘들게 해도 일이 힘들게 한 적은 없다고 믿는 그녀다. 인터뷰 때문에 부랴부랴 대전서 올라왔다는 그녀는 현재 봉만대 감독의 충무로 입성작 <사랑>의 스틸을 찍고 있는 중이란다.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이보경

프로필

→ 1973년생

→ <유령> <동첩> <노랑머리2> <로드무비> 스틸, 포스터 작업

→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포스터 작업

→ 현재 봉만대 감독의 <사랑> 스틸 담당

→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사진 담당

→ 여성지 <엘르> <보그> <바자> <마리끌레르> 등의 사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