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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예술과 서구 기술의 사생아
2001-04-11

인형이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도그마에 빠져버린 <성석전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이 잡지에 애니메이션 관련 글을 기고하는 죄(?) 덕분에 <성석전설>에 대한 ‘영화읽기’를 부탁받았을 때 솔직히 무척 난감했다. 왜냐하면 <성석전설>은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의 범주에서 판단할 때 ‘애니메이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형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무척 많다. 체코의 이른 트른카나

일본의 가와모토 기하치로는 <성석전설>과 ‘비슷한 질감’(재질이 나무인지는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의 인형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모양과 느낌의 인형이 등장한다고 하지만 <성석전설>은 이릉 트른카나 가와모토 기하치로의 작품과는 근본적으로 특성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인형(퍼펫) 애니메이션’의 경우 한 동작 한 동작 프레임을 끊어서 촬영한다. 인형, 클레이, 모델, 오브제 등 그림이 아닌 물체를

등장시킨 애니메이션들을 총칭해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성석전설>은 ‘스톱모션’ 촬영이 아니라

일반 ‘실사영화’(live-action film)처럼 연속촬영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성석전설>에 등장하는 인형은 모두 밑에서 전문 조작자들이

손으로 동작을 컨트롤한다. 일본의 경우 이런 장르의 영화들을 ‘특수촬영영화’, 일명 ‘특촬영화’라고 부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하게

구분할 말이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작품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 소개됐을 때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됐다. 물론 지금도 애니메이션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요란한 포장부터 벗기고 보자

하긴 애니메이션이든 아니든 솔직히 관객에게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관객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영화가 얼마나

재미있느냐’이지, 무슨 형식이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둘러싼 오해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세계 최초의 SF 인형무협액션’이란 멋진 상표를 비롯해 ‘최대’, ‘첨단’, ‘최고’ 등의 거창한 수식어들이 붙어 있다. 문제는

그 수식의 진위 여부이다. ‘동양 최대’나 ‘세계 최초’를 좋아하는 것이 우리네 심성이라지만, 요즘은 애니메이션이나 그 유사한 장르의 작품을

소개할 때 이런 유의 거창한 수식어로 작품을 장식하는 것이 아예 관례가 됐다. 일반인의 ‘영화보기’가 제작기법의 우열을 가늠하는 기술토론회도

아닌데, 이게 웬 난리인지….

‘사이언스 픽션’ 즉 공상과학작품으로 해석했던 ‘SF’란 단어가 어떻게 중국 무협물에 붙게 됐는지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라이브 액션’의

인형극에서 보면 이 작품은 절대 최초가 아니다. 우선 언뜻 생각해 봐도 ‘미스 피기’, ‘개구리 커미트’ 등 미국 TV의 인기프로그램인 <머펫쇼>의

각종 ‘스타’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모두 라이브 액션 인형극이다. SF를 너그럽게 ‘판타지’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다고 정상을 참작해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 <머펫쇼>의 창안자인 짐 헨슨이 80년대 발표한 <다크 크리스탈>이나 <라비린스>는 동화 속 세계를 무대로 전설 속의

괴물과 마녀, 마법사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판타지 인형극이다. 몇해 전 개봉한 <피노키오> 역시 애니마트로닉스로 움직이는 정교한 ‘목각인형’이

등장한다.

그럼 SF 인형극은 없는가? 천만에, 1964년부터 66년까지 영국 ITC에서 제작한 TV시리즈 <선더버드>는 각종 재난이나 사고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활약하는 국제구조대원의 활동을 그린 SF 인형극으로 7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MBC를 통해 방송됐다. 이런저런 정황을 따지면 <성석전설>은

‘중국 전통의 인형극을 바탕으로 제작한 인형 무협 라이브-액션영화’로 세계 최초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실감나는 움직임은 일단 합격

그럼 이런 요란한 포장들을 벗기고 <성석전설>을 보자. <성석전설>은 천문석이란 신비한 능력을 가진 ‘무가지보’를

두고 벌이는 강호 무림 고수들의 쟁투를 다룬 무협물이다. 무림의 명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오해에서 출발해 결국 친구끼리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는 오소홍진과 소환진, 애절한 사랑이 추악한 물욕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는 오소홍진과 검려빙, 그리고 자식과 우정 모두를 자신의 야욕을

위해 이용하는 골피 선생. 대의명분과 의리를 목숨같이 여기고 명예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부질없는 것으로 보는 도교적 가치관은 그동안 김용이나

와룡생 등 대만 무협작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접했던 내용이다. 사실 <성석전설>의 우열을 평가하는 기준은 참신한 소재나 정교하게 설계된 내러티브

구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나 제작진 모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것은 ‘움직임’(action)이다.

애니메이션이든 라이브-액션이든 인형을 등장시켰을 때 우리는 평가의 기준을 얼마나 인형들이 사실적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얼마나 ‘사람처럼’

움직이느냐에 둔다. <성석전설>은 그런 면에서 일단 합격점을 받은 것 같다. 신파조의 늘어진 내용에 지나치게 정형화된 인물, 때론 유치할 정도로

뻔한 갈등 구조가 실소를 자아내기는 하지만, 현란한 무림 고수들의 대결은 ‘실감난다’, ‘멋지다’란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프리뷰들도 대개 공들인 액션과 시각효과라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러면 과연 <성석전설>은 정말 ‘사실적인’ 움직임이 돋보인 영화일까? <성석전설>에서 카메라는 관객이 인형을 차분하고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빠르게 인형의 모습을 훑어내리는가 하면, 인형들의 모습도 아무리 크게 잡아야 웨스트숏 정도이다. 그나마 1초

이상 머물지 않고, 바로 손이나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빠르게 편집이 된다.

제작상의 한계, 시각효과로 감추다

고수들이 대결을 펼치는 상황이 되면 카메라의 부산함은 더욱 심해진다. 온전히 인형의 얼굴이나 전신을 담은 컷은 거의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나의 동작은 수십개의 컷으로 잘게 미분화돼 빠르게 흘러간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인형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3D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한

시각효과를 보여줄 때뿐이다. 이나마 정신없이 번쩍이는 시각효과로 인해 인형의 모습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물론 이런 과장된 카메라워크나 빠른 호흡의 편집은 그동안 TV나 스크린을 통해 숱하게 접했던 무협물의 친숙한 특징들이다. <성석전설>의 ‘움직임이

실감난다’는 것은 인형의 동작이 ‘사실적’이라는 의미보다는 화면구성이 무협이란 장르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동질감의 표현이다.

냉정히 말해 이 작품에서 인형 자체의 ‘움직임’은 관객에게 내놓을 주력 상품은 아니다. 영화에서 간간이 보여주는 인형들의 움직임은 엄청난 물량투자를

했다는 시각효과에 비해 너무 투박하고 거칠다. 기껏해야 팔을 휘두르고 어깨를 움찔거리는 단조로운 동작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섬세한 얼굴

표정은 고사하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몸을 구부리는 동작조차 버겁고 힘들어 보인다.

이는 ‘라이브-액션 인형극’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직접 조정하는 인형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으면서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담한 화면의 TV면 모를까, 커다란 스크린에서 어색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인형들을 100분 가까이 지켜볼

정도로 관객은 너그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첨단의 컴퓨터 기술’이라고 자랑한 <성석전설>의 현란한 시각효과는 사실적인 움직임을 표현할

수 없는 제작상의 한계를 숨기기 위한 고육책이다.

‘포대희’ 고유의 특성은 어디로 갔는가?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뒤집어보자. 인형이 등장하는 모든 영상물은 꼭 사실적인 움직임을 가져야 가치가 있는지….장르는 다르지만 역시 인형이

등장하는 가와모토 기하치로의 <화택>(火宅)을 보면 인형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동작이 화려하거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인형들은 오히려 움직이는 장면보다 동작이 멈춘 정지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다. 하지만 적절히 움직임의 이완과 생략을 가미한 인형들의

모습은 가부키 배우들의 연기를 보듯 동작 하나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와모토는 ‘분라쿠’란 일본 고유 인형극의 표현 방식 중에서

절제된 동작으로 함축된 의미를 표현하는 것을 적절히 애니메이션에 접목했다.

인형 애니메이션이나 라이브-액션 인형극에서 ‘사실적인 움직임’이란 일종의 도그마이다. 이는 24프레임의 풀-애니메이션만을 지향하는 디즈니나

잔손 많이 가는 퍼펫툰으로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연출한 팀 버튼 같은 서구 작가가 주입시킨 강요된 가치관이다. 유려한 움직임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인형이 등장하는 영화의 모든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감독을 맡은 황치앙화나 더빙을 담당한 황원취에는 오랜 전통을 가진 중국 인형극 ‘푸다이시’를 바탕으로 <성석전설>을 만들었다. 과연 영화로

만들어진 <성석전설>의 어떤 점이 ‘푸다이시’의 전통을 살리고 있는가? <성석전설>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수백년 내려온 전통의 인형극 ‘푸다이시’에

담겨 있는 표현의 미학이었다. 그 매력은 끊이지 않고 매끄럽게 풀려가는 연결동작에 대한 강박관념이 아닌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힘차게 뿌려내는

동작 속에 배어 있는 이야기의 깊이이다. 솔직히 손으로 움직이는 인형극의 묘미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하지만 수입사의 거창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 눈에 띈 것은 ‘푸다이시’가 지닌 고유의 특성을

지우고 서구적인 시각효과로 ‘사실적인 움직임’을 꾸미려 한 감독의 안간힘뿐이다. ‘인형이 등장하는데 인형은 뒷전이고, 컴퓨터그래픽이 주인인

인형극.’ 이 어정쩡한 난센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찌보면 그럭저럭 재미있게 볼 수 있는 B급 특촬영화라고 할 수 있는 <성석전설>은 고유의 특성을 상실한 전통 유희가 서구의 기술과 잘못 결합됐을

때 어떤 사생아가 등장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뭐 남만 탓할 일도 아니다. 우리 역시 판소리나 국악만 등장해도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