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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경제학
2002-10-31

정태인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아뿔싸…. 이게 내가 쓰는 글이 들어갈 방 이름이란다. 기라성 같은 지난 필자들의 우아한 글들을 읽어보니 이제부터 9매를 채워야 하는 내가 바로 그 디스토피아에 갇혔음을 깨닫는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팍팍한 경제학에 핑계를 돌릴 수밖에. 경제학자들은 제각기 유토피아를 그려왔다. 이미 오랫동안 경제학계를 확고하게 장악한, 신고전파의 유토피아는 시장이다. 이 유토피아는 너무나 정교해서 아름다운 로마의 건축물마저 연상시키는데 막상 이 유토피아가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모든 걸 개인의 욕구에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기만 하면 유토피아가 온다니 이 어찌 복음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그런 행동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굶어죽는 일이야 인류 역사 속에 다반사였겠지만 세상에는 먹을 것이 남아돌아 썩어가는데 지구의 몇십억 인구가 1달러도 못되는 돈으로 연명하는 건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런 현상은 경제학자들이 시장실패라는 한 단원을 만들어서 자신을 합리화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현실의 고통이다.

이론적으로 표현한다면 약간 복잡해질지 모르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의 절박한 욕구(need)는 수요(demand)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욕구는 그것이 기아선상의 식욕일지라도 애초에 충족될 수 없는 허욕인 것이다. 이러니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라면 그 고통이 해결될 리 없다. 아다시피 시장유토피아에서 천국은 수요공급곡선이 만나는 점에서 이뤄지는데 이들의 욕구는 애초에 수요곡선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국가나 어떤 공적기구가 전 경제를 통제하는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던 사회주의 역시 뭐라 변명해도 이미 현실적으로 파탄이 났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이론, 저 이론 돌고돌아 내가 그래도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경우는 내 얘기가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때뿐이라는 다분히 실용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머리 좋은 경제학자들은 간단하게 그래프를 그려서, 예컨대 수요곡선을 5cm만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면 해결된다는 ‘정답’을 내놓는다. 균형점만 보면 분명히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그 5cm를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는 안중에도 없다. 때로는 3cm를 못 가서 폭동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어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교해야 할 것은 현재의 고통과 천국으로 이동하는 고통이겠지만 그런 경제학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자면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정확히 계산해서 행동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 자체에 문제가 있다. 내 식으로 얘기하자면 이 합리적 인간들은 고통무감각증 환자들이다. 거꾸로 현실의 인간들을 고통무감각증 환자들로 상정함으로써 우리가 이론적으로나마 균형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을 말하자면 인간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일 수도 있으며 또 그래서 경제학의 논리유토피아에 도달할 수도 없다. 만일 지성이나 학문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현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때뿐일 것이다.정태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