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타임 크룩스>라는 영화를 봤다(흠흠, 나도 가끔씩은 남들이 안 본 영화를 본다. 가끔씩은…음…사실은 처음이다). 우디 앨런이 얼간이 같은 친구들과 은행을 털려다가 실패하고, 은행까지 가는 땅굴을 파기 위해 연막으로 만들었던 아내의 쿠키가게가 떼돈을 벌어서 엉뚱하게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야기하고 싶은 건 여기서 비교적 비중없는 조역으로 등장하는 휴 그랜트다.
예의 귀족적인 영국식 악센트에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시크한 스타일을 자랑하는 미술품 딜러다. 졸부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우디 앨런의 아내 프렌치의 요청으로 그는 교사가 된다. 프렌치와 함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다니며 이른바 ‘교양수업’을 하는 것이다. 그는 사기꾼이 아닌 그야말로 고상한 문화인이지만 프렌치를 유혹해 결혼으로 한몫 챙기려고 한다. 견물생심이니 그를 비난할 수는 없을 터이다.
영화의 압권은 프렌치가 쫄딱 망한 다음 그를 찾아와 선물했던 값비싼 보석 담배 케이스를 돌려달라고 할 때다. 그는 아주 치사하게 반응한다. 영어가 짧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미쳤니 이건 내거야. 절대 못 줘” 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점잖은 영국식 악센트는 여전하시다.
푸하하하하, 사랑스러운 휴 그랜트 같으니라구.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휴 그랜트가 이 장면에서 시크한 인간, 또는 우아한 교양인의 한 정형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바짓자락에 훈장처럼 막걸리 자국을 남기고 다니는 사람도 한심하지만 날아갈 듯 세련된 차림새에 재즈와 와인에 대해서 꿰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늘 이와 비슷한 장면을 떠올리곤 했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말이다.
그는 훌륭하다. 박식한 미술 지식을 자랑하고 매너 또한 우아하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 와인맛의 미묘한 차이도 정확하게 짚어낼 거다. 그리고 자기 잇속 챙기는 일에는 국물도 없다. 물론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선파티니 하는 것에는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그 역시 시크하니까.
<스몰 타임 크룩스>에서와는 조금 다르지만 휴 그랜트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어바웃 어 보이>에서도 ‘시크 판타지’를 깨는 역할로 등장했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다니엘이나 <어바웃 어 보이>의 윌이나 겉보기는 하늘하늘한 실크지만 실상은 금박 붙인 나일론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쓰레기 같은 인물이란 말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쿨함’의 양면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인 것이다.
요새 사교파티라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재즈 밴드의 공연에 가면 구경할 수 있는 한편의 코미디 같은 풍경(패션쇼를 보러 온 건지 음악을 들으러 온 건지 헷갈리지만 모델의 면면으로 봐서 패션쇼는 아닌 게 확실한)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다. 사교파티에 가는 건 자유지만 노회한 언니 입장에서 한마디 충고하련다. 20대 여성들이여, 시크한 남성 너무 좋아하지 말길. 헤어질 때 자신이 받았던 선물 고스란히 토해내고도 줬던 선물은 돌려받지 못하기 십상이다. 특히 비싼 귀중품들…. 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