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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두 가지 시선, 네 가지 의문...비판론
2001-04-13

노스탤지어를 이용한 ‘퇴행의 영화’

■ 맹목적 우정에 대한 진부한 신화에 그친 영화 <친구>

홍성남 | 영화평론가

“노스탤지어라 불리는, 일종의 퇴행적인 기억으로서의 다른 영화들이 있다…. 노스탤지어적인

영화란(픽션과 다큐멘터리 양자 공히) 스냅 사진의 상태에, 코닥과 폴라로이드가 내게 확인시켜주듯이, 노스탤지어의 완벽한 형태인 바로 그것에,

즉 질문으로서가 아닌 소유물로서의 과거에 이르기를 갈망한다.”(제이 캔터의 글 ‘죽음과 이미지’에서)

<친구>의 스토리가 처음으로 하나의 중요한 매듭을 만드는 지점은 아마도 상택에게 준석이 진숙을 ‘건네주는’ 장면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상으로 보면 바로 그쯤에서 영화가 중심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로서 상택과 준석 사이의 남성적인 결속이 본격적으로 비롯되고

또 후반부의 비극을 낳게 할 한 가지 계기로서 준석에 대한 동수의 열패감도 얼핏 낌새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이야기의 궤적에서 이처럼 일종의 이정표가 됨직한 자리를 만들어놓고는 그것에 당연히 결부되었어야 할 드라마상의 동기는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준석이 왜 그동안 서로 소원하게 지내왔던 상택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었는지 영화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소상히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친구 아이가”라는 준석의 단순명료한 말을 떠올려볼 때 ‘맹목적’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우정을 이야기하려는 감독의 의도처럼도

보이지만, 영화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다보면 다른 식의 추론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즉 이 영화의 화자 또는 감독 역시 그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친구>라는 이 영화는 상택의, 혹은 곽경택 감독의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니

그(들)가 정말이지 몰랐던 사실을 불투명하게 처리한 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까지 한 것이다.

인과관계 없는 설정, 평면적 캐릭터

이미 여러 지면들을 통해 밝혀졌듯이 <친구>는 실제로 곽경택 감독 자신의 기억 속에 고여 있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여기서 그는 전술한 것처럼 자신의 대리인인 상택을 화자로 내세워, 자신과 관련된 그 아련한 과거를 마치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친구>는 거의 감독, 또는 화자 자신에 의한 기억의 사적 전유라고도 불러도 좋을 그런 내레이션

전략을 세우는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몇몇 한계들은 우선적으로 그것에서부터 비롯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우선 감독의 시선을 대신하고 있는 상택의 위치부터 자리매김해보도록 하자. 그는 “바다 위에 흩어진 섬들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추억”을

캐내는 동력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만 단지 그렇게 그 기억을 거둬들일 뿐 그것을 꿰뚫어보지는 못하는 그런 인물이다. 영화의 주무대인 깡패 세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택의 시선이 영화에 채택되면서 영화는 대체로 분절된 에피소드들만을 이어붙이는 구성을 갖추게 되었고

그 이야기의 탄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상실해버린다.

이를테면 준석은 아버지가 건달이었기에 그 나쁜 유전인자에 의해 건달의 길을 밟게 되고, 동수는 또 아버지가 죽은 사람의 염이나 하는 ‘비천한’

직업을 가졌기에 그것에 대한 반발로 결국 깡패 세계에 입문한다. 여느 깡패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식의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거의 자동적으로

되풀이될 뿐, 간헐적인 상택의 시선으로는 인과관계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연결고리의 모양새와 그곳에 숨겨진 어떤 비밀을 들춰보여줄 재간이 없다.

그래서 <친구>는 불운한 인물들의 하강하는 운명의 이야기를 그리 설득력 있게 전해주질 못한다. 그리고 상택의 시선은 영화 속에 그려지는

깡패 세계에 대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상적인 것 이상을 보여줄 능력이 되질 않는다. 유오성과 장동건이 제아무리 제 역할들을 훌륭히 소화해냈다고

하더라도, 캐릭터로서 준석과 동수는 각각 의리에 목숨을 거는 강직한 깡패와 자신의 입신을 위해 배신하는 깡패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그저 충실한

일면적인 인물들일 뿐이다. 그래서 <친구>는 사회의 바깥을 부유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에 대한 미묘한 탐구의 자격이 주어질 수 없다.

상택은 지각적인 면에서는 거의 방관한다고 할 정도로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인식적인 면에서는 언제든 자신의 친구들과 혹은 지나간

추억과 감정적으로 동화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비록 준석만큼 친구니 우정이니 하는 단어를 자주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친구들

사이의 결합을 바라고 그들 사이의 결별을 아쉬워하는 인물이다. 영화 내내 어떤 자각과 상관없어보이던 그도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마침내 일종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감옥에 간 준석을 면회하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용지에는 관계를 적는 공란이 있었다. 그곳에 ‘친구’라고 쓰고

난 상택은 그제야 그 말의 소중함을 곱씹어보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이제 완성을 보는 것은 그저 친구, 우정, 그것들의 소중함에 대한 거의

맹목적이고 진부한 신화일 뿐이다.

실제 기억에 충실한, 그러나 너무도 감상적인

7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동안 부산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곽경택 감독은 자신의 기억에 충실할 것을 고집하며 영화를

결국에는 다른 어떤 가능성들보다는 단순히 ‘친구’라는 단어로 귀결시켰다. 영화 속에서 ‘친구’(親舊)의 본래 말뜻이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임을 굳이 상기시켜주듯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지나간 세월로서의 ‘과거’였던 것이다. 영화 속 네 친구들이 친구들로 남았는가에

대한 가장 적당한 대답 가운데 하나는 그냥 그들이 우연하게도 과거를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우정을 나눈 과거란 아무리 신산했을지라도

소유하고픈 이상화한 과거이기 십상이다. 그러고보면 과거에 뿌리를 둔 친구에 대한 어떤 이야기들은 노스탤지어적 양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영악하게도 전 시대의 그럴듯한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스냅 사진으로서 <친구>는 그 점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성공적인 ‘퇴행의

영화’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두편의 노스탤지어 영화를 나란히 놓아 보자. 세르지오 레오네의 갱스터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나

<친구>는 둘 다 지나간 시대의 기억을 되살리려 하고 그것에 과도한 감상주의의 분위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는 아주 닮은 영화들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이 기대고 있는 기억의 레퍼런스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레오네의 갱스터영화는 미국사회를 기억하는 영화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미국의 고전적인 갱스터영화를 기억하는 영화, 그것에 과도한 경배를 바쳐서 나온, 갱스터에 대한 극히 감상주의적인 영화쪽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반면 <친구>는 감독 자신의 픽션 같은 실제 기억을 소중히 하는 깡패영화다. 과연 어느 쪽이 더 퇴행적인 것일까?

▶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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