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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장희빈>으로 부활한 그들의 가상대화
2002-11-13

김두한,장희빈과 맞장뜨다

* <야인시대> SBS 월·화 밤 9시55분* <장희빈> KBS 수·목 밤 9시55분

김두한: 안녕하쇼, 나 김두한이요.

장희빈: 과연 배짱깨나 두둑한 인물이로구나. 네가 한때 조선의 국모였던 내게 이다지도 방자한 태도를 보인단 말이냐.

김두한: 이거 왜 이러쇼. 지금은 21세기요. 17세기에 살았던 사람이라 잘 모르나 본데,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말은 오래 전에 사라졌어요. 요즘은 돈 많고 유명한 사람이 대접을 받는다오. 나는 월요일과 화요일, 희빈 마마는 수요일과 목요일에 이 나라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처진데, 내가 마마랑 맞장을 못 뜰 이유가 없지. 21세기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스타’라고 부르는데, 그건 알랑가 모르겄수.

장희빈: 만나는 사람들마다 맞장뜨는 걸 업으로 삼더니, 네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내가 살아생전보다 죽고 난 뒤에 더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나라고 왜 모르겠느냐. 남인과 서인이 서로 물고 뜯는 와중에 전하(숙종)마저 내게 등을 돌리고 결국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는데, 그나마 후세 사람들이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어 조금은 위안이 되는구나.

김두한: 생각해보면 마마도 참 장하쇼. 대체 몇 번째요 방송만 따져도, 이 땅에 텔레비전이 보급된 뒤에 가장 자주 등장한 인물이 아닌가 싶은데. 윤여정, 전인화, 정선경 같은 연기자들이 마마의 분신으로 활약했지, 아마 이번에 나오는 김혜수라는 배우는 한번 출연하는 데 700만원이나 받는다던데, 마마의 몸값이 그야말로 금값이구려.

장희빈: 내 삶이 허구의 형식을 빌려 인구에 회자된 것이 어찌 방송에서뿐이겠느냐. 심지어 내가 두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나를 소재로 한 소설이 발표되었더니라. 웬수 같은 서인놈들 중에 김만중이라고 글깨나 쓰는 인물이 있었는데,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에서 인현왕후를 편들고 나를 몹쓸 첩으로 몰아대지 않았겠니. 그때부터 줄곧 인현왕후는 어질고 후덕한 왕비로, 나는 야심 많고 질투 심한 첩으로…, 어리숙한 숙종의 혼을 빼놓고 종사를 어지럽힌 못된 여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느니라. 요새는 이런 여자를 ‘팜므파탈’이라고 하는데, 무식한 네가 그걸 알는지 모르겠구나.

김두한: 역시 희빈 마마시구려. 농담 한번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으니. 그래도 이번에 방송하는 <장희빈>은 좀 다를 거라고 들었수.

장희빈: 시대가 변하질 않았느냐. 가부장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남성중심 사회에서야 내가 ‘현모양처 신드롬’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 시청자들도 보는 눈이 생겼느니. 날 때부터 이마에 ‘악녀’라고 써붙이고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다더냐. 중인인 아버지와 그 집 종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남인들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던 숙부의 간계로 궁궐에 들어갔고, 당시 20대였던 전하를 만나 한때 좋은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나 같은 천출이, 남인과 서인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궐 안에서 제 명대로 살자면 독한 맘을 품지 않을 수가 있었겠느냐 남정네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평범함을 거부했던 한 여인의 삶이 얼마나 신산하고 덧없는 것이었는지, 이번에는 좀 제대로 보여주었으면 좋겠구나. 자네야 늘 영웅으로 묘사되니 나 같은 설움은 없겠구먼.

김두한: 천만의 말씀이요. 애초에는 “인간 김두한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겠다”고 하더니, 내가 종로바닥 평정하는 과정에서 시청률이 50%까지 오르니까 그 부분을 주야장창 늘려서 벌써 두달 넘게 싸움질만 하고 있수.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서 왜 굳이 나를 불러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강호를 평정하는 무사를 등장시킬 것이지. 마마는 시대가 변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다니까. 시청자들은 우리 삶의 한 단면만 좋아하거든. 마마도 안심하지 마세요. 희빈 마마가 인현왕후와 맞장을 뜨고, 서로 시기 질투하는 부분에서 시청률이 높아지면 재해석이고 뭐고 물거품이 될 테니.

장희빈: 허허, 자네가 품은 한이 있었던 게로군. 그래도 그리 꽁한 마음을 먹을 일만은 아니네. 방금 자네가 말한 그 부분이, 우리가 끊임없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일제시대에 종로를 주먹으로 평정하고,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양반 출신의 중전과 대적해 승리하고. 그래도 자네와 나는 자부심을 가져야 해. 장희빈과 김두한에 대한 드라마가 이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지면, 드라마 속에서 우리를 묘사하는 방식이 그 시대를 읽는 잣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그게 후손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게야.

김두한: 희빈 마마가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 근데 이걸 어쩌지 벌써 하야시와 맞장뜰 시간이요. 오늘은 이쯤 해두고, 다음에 또 찾아뵙겠수다.

장희빈: 그러시게. 나도 갈 길이 멀구먼.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