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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크라이 우먼>,<금요일밤>,<여성교도소>,<하폰>,<욕망>
2002-11-15

<그녀에게>

스페인, 2002년,112분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오후 8시 시민회관

한 사람이 객석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아들을 잃고 극장에서 하염없이 흐느끼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마뉴엘라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런 시작은 익숙하다. 무대는 현실을 닮아있고 현실은 무대처럼 극적이다. 하지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인터미션 삼아 엮여져 있었다면, <그녀에게>는 고통과 회환을 담은 피나 바우시의 퍼포먼스를 서막과 피날레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둘러 놓는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마르코다. 마르코는 정열적인 투우사 리디아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투우경기중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간호사 베니그노는 아름다운 무용수 알리시아를 흠모하지만 알리시아 역시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이 두 남자가 극장에 이어 병원에서 다시 만난다. 리디아가 죽어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고 절망에 빠진 마르코에 반해 베니그노는 알리시아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으며 지난 4년동안 그녀를 정성껏 씻고 문지르고 이야기를 건네고 사랑한다. 마르코는 처음엔 그런 베니그노를 이해할수 없지만 점점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전염되어 간다. 그러나 두 남자 사이에 우정이 싹틀 무렵, 베니그노는 알리사아를 강간한 죄로 투옥된다.

동성애와 양성애, 치정과 강간, 원색의 키취적 취향, 급하강과 급상승을 반복하는 신경증적 감정상태, 그 모든것이 한데 뒤섞인 아수라장을 놀이터삼아 자라났던 ‘스페인의 악동’ 페드로 알모도바르. 이 발칙한 소년이 흙묻은 손을 털고 성숙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은 이미 96년작 <비밀의 꽃>부터 <내 어머니의 모든것>으로 이어지며 예고되고, 확인되었던 바이지만 최신작 <그녀에게>는 알모도바르의 원숙의 정도를 확연히 보여준다. 물론 이 영화는 여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전작들과 달리 여자들은 시체처럼 누워있으고 주로 남자들이 극을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매 작품마다 여성성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았던 이 ‘여성의 감독’은 이번엔 ‘그녀들’을 함께 사랑하고 뒹구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몸을 닦아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대가 없는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신격화된 존재로 상승시킨다. 하여 ‘그녀’들의 왁자지껄한 수다가 아니라 ‘그’의 고해성사같은 속삭임을 따라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이 영화는 리디아가 투우복을 갈아입는 과정과 알리시아에게 환자복을 갈아입히는 과정을 마치 종교의식 치르듯 성스럽게 표현한다. 이런 여성성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숭배는 영화속 영화로 나오는 <줄어든 연인>(Shrinking Lover)의 결말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베니그노가 잠든 알리시아의 몸을 닦아주며 이야기 해주는 이 흑백무성영화는 화학약품을 잘못마신 후 몸이 손가락만 하게 줄어들어든 한 남자가 결국엔 자신의 연인의 질속으로 걸어들어가 영원히 살았다는것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후반부로 가서는 이런 베니그노의 집착적 사랑이 과잉의 멜로드라마로 치닫긴 하지만 이미 과잉의 극단을 맛보았던 감독이 선보이는 눈물의 순애보는 오로지 이브만을 위해 존재하는 ‘아담의 모든것’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백은하 기자

<크라이 우먼> Cry Woman

중국, 2002, 91분

감독 류 빙지엔

오전 11시 부산1관

‘크라이 우먼’은 그 자신을 위해 눈물흘리는 여자가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만 우는 소리를 하는 그녀는 눈물 한방울 생산할 여유도 없다. 맞으면서 맞지 않은 제목을 가진 영화 <크라이 우먼>은 아무렇게나 머리를 틀어올리고 생활비를 구하러 나서는 이 여자 왕귀샹의 눈물없는 생존기다. 왕귀샹은 거리에서 불법 DVD를 팔아 생활을 꾸리는 젊은 여자다. 그녀의 이웃이 아이를 맡기고 짐을 싸 도망간 날, 도박판을 벌인 귀샹의 남편 창겡은 폭행죄로 감옥에 끌려간다. 출구는 없다. 창겡에게 맞은 남자는 병원비를 요구하고, 창겡은 빨리 벌금을 마련해 자기를 꺼내달라며 조르고, 오갈데 없는 아이는 엄마만 찾으며 울어댄다. 비굴한 웃음을 깔면서 이미 결혼한 옛 남자친구와 동침한 귀샹은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다. 장의사 영업 중인 남자친구가 빚쟁이를 쫓기 위한 귀샹의 거짓울음을 듣고는 장례식에서 곡해주는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한때 오페라단에서 일했던 귀샹은 죽은 사람에게 알맞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해 ‘크라이 우먼’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발돋움한다.

<크라이 우먼>은 중국에서 먹고 사는 일이란 이렇게 힘든 것인가라는 한탄을 자아내는 영화다. 귀샹은 육체적으로 고달프게 생활하진 않는다. 목이 터져라 울음을 팔아야 하지만, 웃음을 파는 옛 동료보단 그래도 나은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가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보다 정신적인 공황이다. 곡을 하면서도 눈물을 비치지 않는 귀샹이 위선자라며 장례식장에서 쫓겨날 때나 춤과 노래로 상류층 여인의 애완견을 전송할 때, 세파에 치일 대로 치인 귀샹보다 관객의 마음이 먼저 무너질 것이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은 신기하게도 세상을 버티는 끈기로 이어진다. 이 여인을 바라보는 감독 류 빙지엔은 연민 따위로 1시간 30분의 짧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타락엔 여러가지 길이 있는 까닭에 거짓 울음도 더럽다 욕먹을 수 있지만, 독하게 자신의 행동을 지워버리는 귀샹에겐 타락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하는 귀샹은 가끔 멍해질 뿐 어떤 모욕도 앙칼지게 맞받아치며 마음 속의 염산을 뿌려 없애버린다. 우는 듯 웃는 듯, 감정조차 사치라고 여기는 것 같은 귀샹의 얼굴은 곧 중국의 얼굴이며 많은 아시아의 얼굴일 것이다. <크라이 우먼>은 2001년 PPP 프로젝트였고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김현정 기자

<금요일 밤> Friday Night

월드시네마/프랑스/클레어 드니/2002년/90분

금요일. 로르가 싱글로서의 생활을 마감하는 날이다. 내일이면 남자친구와 동거에 들어가는 로르는 저녁 약속을 위해 차를 달려 보지만, 이례적인 교통 체증은 언제 풀릴지 알 길이 없다. 로르는 그러나 답답한 차 속에서 웬지 모를 평화와 안식을 느낀다. 인내심을 잃은 사람들은 도로 위에서 고성을 지르고 우왕좌왕하는데, 그 혼란 속에 정지화면처럼 홀로 서 있는 남자가 로르의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 그에게 매혹된 로르는 남자를 차에 태운다. 그리고 그 밤에 로르는 그와 헤어지고 만나기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본능을 따른다. 모두가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날 밤, 그들은 각자 갈 길이 있다. 정체된 도로에서, 더 이상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됐을때, 그들은 서로를 알아 봤고, 다른 길로 함께 ‘비상 대피’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그 곳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 비고의 뒤를 잇는 프랑스 영화의 시인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클레어 드니의 신작 <금요일 밤>은 일탈과 관능에 관한 매혹적인 한 편의 시다. 이 영화에는 클레어 드니의 초기작들에 일관돼 있던 이국적인 것에 대한 매혹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대신 관능성에 대한 탐구와 생략적인 스토리텔링 등은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영화 속에서 대상이고 객체였던 여성의 자리는 남성의 것이 돼 있고, 남성의 육체에 대한 매혹도 여전하다. <금요일 밤>에서 하룻밤 일탈의 자유와 주도권을 여성에게 쥐어준 것은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로르의 시선을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따라, 감춰지기도 하고 덧입혀지기도 하는 장면들은 금요일 밤의 일탈에 몽환적인 느낌을 더하고 있다.

박은영 기자

<여성 교도소> Women's Prison

새로운 물결/이란/마니제 헤크맛/2002년/106분

수년 전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써클>을 통해 여성의 범죄와 비행을 부르는 이란 사회의 구조를 이야기한 바 있다. 탈옥하거나 출옥한 여성들이 반나절의 유랑 끝에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그 슬프고 답답한 이야기. 여기, 감옥 속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뤄 보겠다며, 아예 감옥으로 들어간 여성이 있다. 마니제 헤크맛이라는 이름의 여성 감독은 이란의 여성 죄수들에 대한 방대하고 생생한 리서치를 토대로 완성한 시나리오 <여성 교도소>를 들고 실제 감옥에 들어가 75일간 카메라를 돌렸다. 극영화라기엔 너무 리얼한 <여성 교도소>의 카메라는 감옥에 갇힌 20년의 세월을 통해 ‘이란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또한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놓인 여성들을 통해, 여성 간의 대립과 결속을 이야기한다.

이란의 한 여감옥. 제멋대로인 여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교도관이 부임해 온다. 말을 듣지 않는 죄수들은 엄벌하는 등 교도관은 서서히 자신의 통제권을 넓혀 가지만, 어머니를 구하려고 양아버지를 살해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미트라가 눈엣가시다. 독립적이고 강인한 미트라는 교도관과 사사건건 부딪히지만 때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 등 기묘한 애증의 세월을 함께 한다. 그 사이, 유난히 예쁘던 소녀 죄수는 성추행당한 뒤 자살하고, 간수와 죄수 사이엔 마약 거래가 시작된다. 옥중에서 태어난 아기는 천덕꾸러기 문제아로 자라나 감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리는 감옥의 철문.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그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하는 미트라는 이미 초로의 노파가 돼 있다.

박은영 기자

<하폰> Japon

월드시네마-비평가주간/멕시코-스페인/카를로스 레이가다스/2002년/122분

한 남자가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다. 그의 얼굴은 외딴 산자락의 비경 앞에서도 무감동해 보인다. 이것은 자살할 자리를 알아보러 가는, 그의 생애 마지막 여행인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 곳 사람들의 대응이다. 남자가 길을 물으며 ‘자살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놀라거나 말리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도 간섭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아는 것과 가진 것을 나눠 줄 뿐이다. 묵을 곳을 찾는 남자는 깊은 산중에서 혼자 사는 인디언 노파를 만나게 되는데, 이 노인의 태도도 비슷하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그 자연에 동화된 듯 ‘아낌없이 주는’ 노파의 삶, 감옥에서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를 보고 자위를 했다는 노파의 조카 이야기는, 남자의 얼어 붙은 마음에, 작고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 이제 그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생각한다.

<하폰>은 길 위의 영화다. 길 위에 삶과 죽음, 좌절과 희망의 인간사를 겹겹이 포개놓은 영화다. 남자는 자살을 결심하고 외딴 산중으로 들어가지만, 그가 찾아들어간 자연은 스스로 숨을 끊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생의 욕망은, 안데스의 자연을 닮은 인디언 노파의 이해와 애정으로 깊은 잠을 깬다. 멕시코 출신의 신예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감독의 작품인 <하폰>은 여러모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길 위에서 삶의 진리와 철학을 발견하고 풀어가는 품새나, 가공하지 않은 자연과 비전문 아마추어 배우들에게서 깊고 풍부한 표정을 이끌어내는 감독의 솜씨는 남미 영화계의 새로운 작가 탄생을 예감케 한다.

박은영 기자

<욕망>

한국, 2002년, 85분

감독 김응수, 오후 8시 대영 2관

스무살의 청년 레오는 유부남인 규민을 사랑한다. 그러나 규민은 그에게 돌연 이별을 선언하고 레오는 헤어짐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느날 레오는 규민의 아내인 로사를 호스트바에서 만나게 된다. 레오는 질투심과 함께 이별로 인한 외로움을 보상받기 위해 로사와 격정적인 섹스를 나눈다. 평범한 주부였던 로사는 어느날부터인가 남편에게 다른남자가 있음을 눈치 챈다. 그리고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레오에게 접근한다. 이후 로사와 레오는 자신의 욕망의 주체가 아닌 다른 대상에의 집착과 탐닉을 시작한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30대 운동권들의 후일담을 그린 <시간은 오래 시속된다>로 장편데뷔한 김응수감독의 두번째장편영화 <욕망>은 “더운 여름날 거리는 텅비어 있었다.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애인을 발견하고 뛰어가다가 돌연 공중전화부스로가서 약속을 못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뒤따라온 풋풋한 소녀를 따라 소녀의 집으로 갔다”는 감독의 3년전 겨울의 모호한 꿈과 그 꿈만큼이나 모호한 현실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 졌다.

<욕망>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할것은 박기웅촬영감독의 카메라에 포착된 낮선 서울의 풍경. HD디지털카메라를 통해 표현된 독특한 색감과 질감은 그 향기없고 익숙한 도시를 지금껏 본적없는 신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화려한 미장센을 보이는 실내신은 그 속에 놓인 인물들의 황량하고 건조한 내면과 대비되며 빛을 발한다. 2002년 토론토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부산영화제를 통해 국내관객과 처음 조우한다.

백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