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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아시스> <죽어도 좋아>에 나타난 타자와의 조우
2002-11-16

한국영화, 드디어 ‘그들’을 만나다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1990년 중반 이후 등장한 새로운 한국영화는 젊은이들의 놀이터였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인물도 그걸 보는 사람도 젊은이들이었다. 혹은 젊음이 상징하는 육체적 정신적 자질을 지닌 주체였다. 이 세대적 폐쇄성은 한국영화가 지닌 윤리적 결핍이었다. 따라서 세 영화의 특별한 주인공들은 텍스트 상의 기능을 넘어, 그들의 실존이 한국영화의 결핍과 허기를 상기시키고 달랜다.

<집으로…>와 <죽어도 좋아>의 주인공들은 노인이며 <오아시스>의 주인공 중 하나는 장애자, 다른 하나는 구제불능의 부적격자다. 세 영화 모두 작품성에서 국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아직 미개봉 상태인 <죽어도 좋아>를 빼면 관객과의 만남도 성공적이었다. 이 사실을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는 방식은 한국영화의 성공적인 소재 다양화, 혹은 캐릭터 다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세 영화가 한국영화의 일반 경향과의 일종의 단절로 느껴지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단절은 한국영화가 배제하거나 주변화해왔던 존재를 중심화하는 데서 오는 윤리적 각성을 동반한다.

1990년 중반부터 한국 관객과 갖가지 매체들은 새로운 한국영화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 새로운 한국영화는 젊은이들의 놀이터였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인물도 그걸 보는 사람도 젊은이들이었다. 혹은 젊음이 상징하는 육체적 정신적 자질을 지닌 주체였다. 이 세대적 폐쇄성은 한국영화가 지닌 윤리적 결핍이었다. 레이브 파티(Rave Party)라면 전혀 문제되지 않을 이 윤리적 결핍은, 영화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놀이인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하고 확장하는 주요한(어쩌면 가장 중요한) 담론의 장이 돼버렸으므로, 잠재적인 결핍으로 남는다. 세 영화의 특별한 주인공들은 텍스트 상의 기능을 넘어, 그들의 실존이 한국영화의 결핍과 허기를 상기시키고 달랜다. 요건대 한국영화는 이 영화들을 통해 자신의 타자들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 영화는 그 조우의 방식과 경유지에서 모두 다른 길을 가고 있으며 서로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낯선, 너무나 낯선

<집으로…>의 주인공인 할머니는 70대로 추정되며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다 허리는 굽었고 귀마저 먹었다. 그가 사는 곳은 산골 외딴집이다. 우리는 그런 노인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집으로…>가 이 추레한 할머니라는 타자를 수용하는 방식은 관객의 대리인인 아이가 할머니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 설득의 과정은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이루어진다. <집으로…>에서 제시되는 노인-시골-자연/아이-도시-문명이라는 대립항은 매우 낯익은 것이다. 20세기의 많은 영화가 그래왔듯 <집으로…>는 전자가 후자에 감화되는 경로를 밟는다. 모성과 자연이 문명의 결핍을 일깨우는 것이다.

<집으로…>가 모성과 자연에 관한 기성의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일부 평자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할머니의 헌신성, 산골 마을의 안온함은 낯익은 모성 신화와 소박한 자연주의에 기대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둘의 포옹 혹은 할머니라는 타자의 수용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집으로…>엔 일정한 퇴행성이 있다. 그러나, <집으로…>의 강렬한 정서적 공명을 이것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집으로…>에는 매끈한 주류드라마가 도달하지 못한 생기가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생기는 만듦새의 결함에서 온다. 주인공들의 연기는 정제돼 있고 에피소들은 정교하게 배치돼 있지만, 산골 아이들과 읍내 주민들의 연기는 박자가 맞지 않고 대사는 교과서처럼 발음된다. 이 결함은 텍스트 안에선 TV를 통해 익숙해진 노인들의 정감과 유머를 상기시키며 이완작용을 하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실재하는 산골 노인이라는 영화의 타자를 찾아나선 여정임을 상기시킨다.

<오아시스>와 <죽어도 좋아>에는 <집으로…>의 상우 같은 인물이 없다. <집으로…>는 관객의 대리인이 중심인물로 등장해 타자와 포옹함으로써 타자의 낯섦을 내러티브 안에서 해소하는 반면 <오아시스>와 <죽어도 좋아>에서 교감과 사랑은 타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낯섦은 해소되지 않으며, 타자들은 우리에게 포섭되지 않고 그들의 세계에 남는다. 두 영화는 그래서 <집으로…>보다 불편하다. 그러나 두 영화가 타자들의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같지 않다.

<오아시스>에서 사랑에 빠진 두 타자는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시종 박해받는다.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건 차라리 두 타자가 아니라 타자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주변의 가해자들이다. <오아시스>의 잘 구상되고 적절히 배치된 디테일은 우리가 그 가해자의 대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오아시스>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배타'라는 우리의 죄에 관한 고백처럼 보인다. 매개없이 삽입된 남루한 판타지가 그들의 소망을 형상화할 때, 우리의 죄는 증폭된다.

이상한 점이 있다. <오아시스>의 타자들은 우리의 죄를 징벌하거나 탓하지 않고 결국 그들만의 성에 스스로를 가두며 웃는다. 이 결말은 아름답지만 우리의 죄는 애매해진다. <오아시스>의 결말은 타자들이 우리를 역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어쨌건 타자와의 조우는 궁극적으로 실패했고, 이 결말은 밝은 톤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매우 비관적이다.

<죽어도 좋아>는 내러티브 안에 70대 노인이라는 낯선 주인공들을 타자화하는 시선의 주체가 없다. 그들의 타자성은 내러티브 안에서 확인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즉물적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 점 때문에, 감독이 다큐멘터리 PD 출신이며 그가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만났던 실존 인물의 실화를 당사자들이 연기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해도, <죽어도 좋아>는 다큐멘터리보다 더 다큐멘터리적으로 느껴진다.

<죽어도 좋아>의 이야기는 극히 단순하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느낀다. 둘은 섹스를 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 함께 살아간다. 그게 전부다. 그 남녀가 70대 노인이 아니라 20대였다면 이 영화는 거의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야기의 과도한 단순성은 이 영화의 결점이 아니라 낯선 주인공들의 이미지가 내러티브의 여과를 거치지 않고 즉물적 힘을 발휘하는 데 기여하는 장치다. 60여분의 짧은 러닝타임에 비해 지나치게 길어보이는 이들의 사실적 정사 장면이야말로 이들의 낯선 이미지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이다. 물신화가 불가능한 이들의 노쇠한 육체는 우리의 관음적 시선을 괴롭히지만 그들의 이미지엔 불가해한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죽어도 좋아>는 타자성을 고민하지 않고 타자의 이미지에서 생의 감각을 포착한다. 그건 한국영화에서 가장 낯설고 진귀한 체험 가운데 하나다.

Korean Cinema Finally Faces Their Own ‘Outsiders’

, and are symbolic Korean films, which clearly display the recent dramatic changes in the diversity of subject matter and characters in Korean cinema. In and , the main characters are of elderly people, and in , a handicapped woman and an ex-convict steal the spotlight. In another word, above 3 titles represent standpoint that differs from the common standpoint of Korean cinema. Started in mid 1990's, Korean audience and press gave their full support to fresh new Korean films done by younger generation Koreans. Characters within these 'new' cinema and the audience who watch them were young people. Special characters from above 3 films filled the void that existed in Korean cinema. Finally, Korean cinema was faced with the reflection of their own 'outsiders' through these films.

What's interesting about , and is that they all take different route in encountering each ‘outsider.’ In , the main character is an old deaf woman living in a secluded mountain side. In this film, the viewers come to accept this ‘outsider,’ through a young boy's point of view and his own journey of accepting her. In , two lovers, who are also the ‘outsiders,’ are constantly persecuted by their own families and friends. The story unfolds in a way that the viewers sympathize with the persecutors. However, at the end, these 2 ‘outsiders’ inversely show us, the viewers, how they persecute us. On the other hand, in , there is no existence of persecutor, who pushes these two unfamiliar characters into becoming the ‘outsiders.’ Instead, they become the ‘outsiders’ by means of their raw, straight forward, documentary style portrayal. Compared to its short running time, the excessive length of their realistic sex scene is the peak of what makes these people truly the ‘outsiders’ to the aud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