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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에서 온 딸> - 김소희/ 영화평론가
2002-11-20

<연안에서 온 딸> Daughter from Yan'an

중국, 2001년, 120분

감독 이케야 가오루, 오후8시 부산3

 

언제부턴가 나는 영화제에 가서 소문이 빵빵한 작품을 굳이 찾아가지 않고 즉흥적으로 영화를 골라 쓱 들어가는 데에 맛을 들였다. 마치 미지의 카드를 펼치는 것 같은 설레임과 느긋함 때문이다. <연안에서 온 딸>은 올해 2월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런 방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도무지 어떤 멋진 이야기도 갖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소박한, 솔직히 말하면 촌스러운 중국 시골의 젊은 주부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인데, 멋진 다큐멘터리스트는 평범한 한 지점으로부터 출발해서 이야기들을 엮어나가고 급기야는 거시적인 안목에까지 이른다.

이야기의 출발이 되는 것은 자신의 출생 경위를 알고 싶다는 하이샤의 소망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결혼하고 이제 아들 하나를 두게 된 하이샤는 중국 땅 어디서나 발견됨직한 수줍고 얌전하기만 한 여성이다. 그런데 이 작은 여성이 문화혁명이 남긴 가족사와 현대 중국을 건설한 부모 세대의 존재를 넉넉히 껴안는다.

하이샤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이해하고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베이징에 있다는 친부모를 수소문하고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하이샤가 문화혁명 때 연안으로 내려온 학생 커플 사이에서 태어나 버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과정은 동시에 지식인을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각지에 하방 시키면서 엄격하고 경직된 윤리관을 강요했던 문혁에 대한 간접적인 평가과정이기도 하다. 베이징에서는 아버지의 옛 동료들로부터 “하방 되었던 모든 이들의 자식”이라며 환대 받지만, 다른 가정을 갖고 있는 친어머니는 끝내 얼굴 비치기를 거부한다. 아버지는 딸을 환영하는 모임에서 “오늘의 중국을 이룬 것은 우리인데 완전히 잊혀졌다”며 분개한다.

하이샤의 이야기와 병렬적으로 문혁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의 이야기도 중요한 흐름을 이룬다. 신념에 찬 홍위병이었던 헝유링은 한 점 부끄럼 없이 하방 기간을 보내겠다는 결의에 불타지만 의외의 연애사건으로 말미암아 “너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평생 내가 인간인가 짐승인가를 질문하면서 살아왔다”고 카메라를 향해 비로소 목소리를 높인다. 문화혁명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권좌에서 내려와, 개인의 존엄에 관한 사적인 체험으로 재현된다.

안으로 다시 돌아간 딸은 하방된 부모들이 험한 노동과 굶주림, 금욕을 통해 산중에 일궈놓은 밭에서 밀을 가꾸고 수확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엄마 아빠께”로 시작되는 편지를 쓴다. 문혁 세대와 이후 세대는 역사의 상처를 건너뛰어, 아니 그 역사의 흔적을 무대로 유구한 삶의 대하에 다시 몸을 싣는다.

역사란 사실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억의 문제에 더 가깝다. 누가, 어떤 이유로 과거를 되돌아보느냐에 따라 역사 쓰기란 매번 달라지는 현재적인 문제가 된다. <연안에서 온 딸>은 이런 사실을 환기시키는 매력적인 다큐멘터리다.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