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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씨, 부산영화제에서 현실과 환상을 헛갈려하다
2002-11-21

사람들은 그것을 ‘영화’라 부른다

김영하/ 소설가

만화가 이 모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전화의 용건은 간단했다. 그와 내가 부산영화제에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편집장이 어수룩한, 그리고 그와 내가 한때 원고료를 벌었던 모 영화잡지에 말을 잘 하면 ID 패스인가 하는 것을 받을 수 있으며 말을 조금만 더 잘하면 잠자리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숙소의 질은 기대할 수 없지만 비와 눈은 확실히 피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침낭을 가져가야하는 건 아닐까?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자세한 건 물어봐야 알겠지만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가겠다고 했다. 평소 우리는 서로를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영화도 실컷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개막일인 14일에 우리는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다는 부산의 숙소 앞에서 만났다. 생각보단 괜찮은 곳이었다. 서로 다른 교통기관을 타고 내려온 참이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부산역에서 걸어왔다고 한다. 역시 이상한 자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대망의 PIFF광장으로 향했다. 아, 드디어 영화의 바다에 발을 들여놓는구나. 역시나 개막일의 광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십니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리가 오자마자 스타가 뜨는구나. 개막작의 주인공, 장동건이로구나. 우리는 까치발을 하고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자, 거의 다 오셨습니다! 우리는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 봉고차 한 대가 도착했다. 자, 오셨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정몽준! 정몽준! 정몽준! 연호가 터졌다. 내린 사람은 장동건이 아니라 정몽준이었다. 쩝. 남자의 미모를 따지는 우리는 곧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드레스코드인가 뭔가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턱없이 미달한 우리는 범일동 시민회관은 포기하고 남포동을 누볐다. 내일부터는 멋진 날들이 펼쳐질 거야. 한껏 기대에 부푼 우리는 광복동 일대의 술집에 들어갔다. 바텐더들이 이상하게 많았는데 표정이 모두 심상치 않았다. 뭔가를 은밀하게 준비하던 그들은 갑자기 손님을 향해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비유도 판타지도 아니었다. 알콜을 가득 머금은 그들의 입에선 쉴새없이 불길이 뿜어져나왔다. 서너 명의 바텐더가 돌아가며 병을 던지고 받고 마술을 부리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열 번 던지면 두 번은 땅에 떨어졌다. 공포의 쇼였다. 쇼가 끝난 후, 바텐더는 우리에게 다가와 은밀하게 물었다. 서울 바텐더들은 병 안 떨어뜨린다면서요? 나는, 서울에선 이런 쇼를 본 적이 없다고. 아마 내가 가보지 않은 어느 바에선가 하고 있겠지만 거기서도 분명히 병을 심심찮게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안 떨어뜨린다던데.....

다음 날, 어수룩한 잡지사의 담당기자를 만났다. 그는 피닉스 호텔 예매소에 일착으로 줄을 섰으나 시스템 문제로 표를 끊지 못했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데리고 서라벌 호텔로 갔다. 그에게서 받은 ID 카드로 표를 예매했다. 나는, 자기 아내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을 훔치는 바람에 인생이 꼬인 스리랑카 소매치기 이야기로 영화제의 스타트를 끊었고 만화가 이 모군은 LSD 어쩌구 하는, 러닝타임 세 시간짜리 영화를 보러 갔다. 두번째 영화는 두 사람 모두 츠카모토 신야의 . 어느 범생이 여성이 이상한 남자로부터 이상한 사진을 받더니 점점 더 이상해지더라는 영화였는데 보고 나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누가 함부로 자위를 하는가!) 이어지는 영화는 김수용 감독의 <안개>.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이었다. 안개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는 기체로 가득한 영화였다. 잦은 플래쉬백이 신선한 기법인 때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모군은 <안개>가 보다 더 끈적끈적 뇌리에 들러붙는다며 괴이해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번만”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무책임 선언’도 마음에 들어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을 보았다. 질투하는 인간이 나오겠지. 질투 때문에 열 받다가, 진짜루 열 받다가 이윽고 질투의 화신이 되어 질투를 불러일으킨 자들을 죽여버리겠지? 그리고 외치겠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그러나, 영화는 우리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갔다. 질투는 일종의 맥거핀이었다. 영화는 오히려 전혀 딴 얘기, 남자가 어떻게 남자, 그 별로 아름답지 않은 종족이 되는가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감독과 배우들에 대한 사랑이 솟구쳤다. 마구 외치고 싶었다. 아, 기형도가 좋아, 박찬옥이 좋아, 박해일이 좋아, 배종옥이 좋아. 밤새라도 외치고 싶었지만 우리는 이미 네 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다. 피곤했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술은 마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부산의 처가에 다니러 와 있던 아내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올해 여든넷인 그녀의 할머니는 마치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우리가 오자마자 눈을 감으셨다. 한 편만 더 보고 갈게. 나는 총을 잃어버려 정신없이 총 찾다가 결국 자기 총에 맞아죽는 중국 공안 얘기를 보고 나서 서면의 롯데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개막식의 드레스코드를 비웃은 죄였다. 그때 정장을 준비해왔더라면 이런 불상사가 없었을 것이다. 빨간 바지를 입고서는 도저히 장례식장에 갈 수 없었다. 주말 백화점은 사람으로 미어터졌다. 그 난리통을 뚫고 우여곡절 끝에 새 정장을 구해입은 나는 바지춤을 움켜쥐고 영안실로 달려갔다(미처 벨트를 사지 못하여 하체가 불안하였다). 호상이어서 그런지 영안실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다. 단지, 망자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기독교에 귀의하시는 바람에 유족들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목사와 신도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황당한 상황을 맞았다. 절은 헌화로, 곡은 찬송으로 대체되었다. 망자의 개종을 사전에 알지 못한 자식들은 땡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목사는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천국에 가면 다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인에 대한 마지막 효도는 바로 개종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육개장 냄새 풍기는 영안실에서도 부산영화제가 화제였다. 서울에서 내려와야할 유족들이 부산영화제 때문에 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른다는 이야기였다. 살아생전 한 번도 찾아뵌 적 없는 나는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신속하게 상가를 찾아온 훌륭한 손녀 사위로 유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민망했다.

다음날, 나는 다시 남포동으로 돌아왔다. 하필 그날 봐야할 두 편의 영화는 <죽어도 좋아>와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두 편이었다. 영안실에서 돌아와 보기에 적당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끊어놓은 표가 아까워 나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래서였는지 스크린 속 할아버지의 절륜한 정력과 할머니의 때늦은 애교가 부담스러웠다. 화면을 가득 메운 두 노인의 슬픈 맨살! 용서하시라. 나는 영안실에서 축제로 직행한 자가 아닌가. 니들이 노인의 섹스를 알아? 나는 그 직접적인 담화 방식에 주눅 들었다. 산 넘어 산, 다음 영화는 전국의 무당과 영매들이 총 출동하는 버라이어티 다큐멘터리, <영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였다. 거인이 한 손으로 내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 탈탈탈 털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그냥, 캑, 하고 죽는 존재가 아니었다. 죽은 자와는 말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과는 대화가 필요하다. 굿은 우리를 그 죽음과 대면시킨다. 우리는 놀라고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한다. 그것은 좋은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과 같다.

다음날 새벽, 나는 발인에서 하관까지의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관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과 함께 차가운 11월의 땅속으로 내려갔다. 씻김도, 상여 소리도 없는, 그야말로 쿨한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나는 내내 남포동의 영화관들을 그리워했다. 어쩌면 현실의 굿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영화가 우리의 굿이며 우리 모두 제 스스로 영매이며 무당인지 모른다. 우리는 꿈을 통해 꿈꾸고 말을 빌려 말하며 환상으로 환상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화라 부른다.

이번 부산행에서도 무수한 영화들을 만났다. 유독 이번 영화제에서 나는 현실과 환상, 스크린과 거리, 축제와 일상을 분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이 귓가에 쟁쟁하고 입에서 불을 뿜어대던 광복동의 바텐더가 어른거린다. 내 눈 앞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골목으로 사라져가던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모습과 배종옥의 술주정 중에서 어떤 것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밤만 되면 모호해진다.

모호했든 몽롱했든 축제는 끝나가고 있다. 예기치 못한 수확도 있었다. 어수룩한 잡지사가 결코 어수룩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흐.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다음 주에 나올 주간 <씨네21>을 보시면 무슨 말인지 아시게 되리라. 이모 군아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