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수녀님들의 경제학
2002-11-21

정태인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수녀님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게 됐다. 친한 후배교수의 부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옛날 나와 잠깐 사귀었던, 내 아내의 친구가 훗날 수녀가 됐다는 사실도 하겠노라는 약속을 덥석 하게 된 데 얼마간은 작용했을지 모른다(실제로 지금은 머나먼 차드에 가 있는 그 수녀님의 주소를 손에 넣었다). 양성자라고 해서, 초보 수녀님들을 가르치는 수녀님들이 내 학생이다. 그러니까 나이도 지긋한 수녀님들인데 내 선입견 때문인지 눈동자가 하나같이 해맑다. 갑자기 멍해지면서 후회가 밀려온다. 물적욕구는 물론 성적욕구까지 철두철미 제어하고 있을 이들에게 경제학 강의라니, 이게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당장 호모 에코노미쿠스부터 문제다. 인간은 오로지 물질적 욕구를 추구하며 아주 조그마한 차이도 순식간에 계산할 수 있는 존재라며 슬쩍 넘겨다보니 무심한 눈길뿐이다.

다음은 더 큰 문제다. 이렇게 자기 이익만 추구할 때 사회 전체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얘기는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건 혁명이다. 중세시대에 가톨릭이 독점하고 있던 진리, 내 말을 따라야 당신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 오만을 뒤엎은 혁명이라고 내지르고 또다시 눈치. 한 노수녀님은 애쓰는 내가 안쓰러운지 빙긋 웃는다. 수요공급곡선을 설명할 때는 버릇대로 포도주 시장의 예를 들다가, 아차 싶어 “아 술시장은 수녀님들과 안 어울리나요” “괜찮아요. 우리도 술 마실 수 있어요.” 영 봐주는 분위기다. “왜 부식을 담당한 수녀님은 가장 값싸고 좋은 걸 사야 되잖아요 안 그러면 무서운 원장수녀님한테 혼나지 않나요” “까르르.”(불경스럽게도 나한텐 이렇게 들렸다) 수녀들도 이 풍진 세상과 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약점(?)이 공략포인트였다.

한번 요령을 깨달으니 턱없는 주식시장도 설명할 수 있다. 바티칸뿐 아니라 우리나라 주교쯤만 돼도 돈을 관리해야 하니까 틀림없이 주식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그분은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도 마찬가지다. “왜 같이 일하는데 뺀질거리는 수녀님 있죠” 또 한번 까르르, “맞아요!” 힘찬 동의도 나온다. 이리저리 난관을 건너서 이제는 시장의 한계를 설명할 때가 됐다. 공공재가 어쩌고 외부성이 어쩌고 독점이 어쩌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돈없는 필요(need)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demand)가 아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배고픔은 수요곡선에서 제외되고 시장의 원리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대목. 수녀님들의 세계와 경제학의 세계가 접점을 찾았을 것이다.

마지막 일격. “피의자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이기적 행위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걸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나쁜 균형’에서 ‘좋은 균형’으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신뢰와 협동이 필요하며 그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이든 사회주의 경제학이든 이 땅 위의 유토피아를 설파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유토피아일 뿐이며 우리는 지상의 고통을 줄이는 여러 제도를 끝없이 실험할 수 있을 뿐이다. “세 시간 가까이 ‘예수님과 데이트’를 즐긴 두세명의 수녀님들이야말로 경제학을 실천한 것이다. 최대의 만족을 얻는 방법을 찾았으니까”로 첫 시간을 맺는다(그런데 다음주 거시경제학은 또 어쩔 것인가). 정태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