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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한 시네키드, 웃음을 잃다
2001-04-18

호러의 걸작 <이블 데드>에서 최근작 <기프트>까지, 샘 레이미의 영화세계

<기프트>가 샘 레이미의 영화가 아니라면,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기프트>는 스릴러물로는 그냥 그렇다. <왓

라이즈 비니스>가 미리 선보이지 않았다면, 그 소재만이라도 봐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기프트>는 빌리 밥 손튼이

시나리오를 썼다.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썼다는 <기프트>의 시나리오는, 전반부는 높이 살 만한 구석이 있다. 미국 남부,

늪지대가 도처에 자리잡은 시골 마을. 남편이 죽고, ‘저주받은’ 재능을 이용하여 근근히 살아가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타인의 운명을 보는

‘예언자’ 혹은 ‘점쟁이’다.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하는 그 여인의 모습과 그녀가 애정을 갖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뛰어나다. 동시에 <기프트>는

그들과는 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상류계급의 인간들에 대해서는 명백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들에 대한 세부가 일면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타락상을 적시하는 것만은 뛰어나다. 단순히 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한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세력관계와 타락상을 그려내는 빌리

밥 손튼의 시나리오는 탁월한 점이 있다.

실망스러운 <기프트>, 포기와 미련 사이

그러나 <기프트>는 발단과 전개를 능가하는 반전을 선보이지 못한다. 아니 전반부도 시나리오 이외에는 평이하다.

샘 레이미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이블 데드>의 그 유명한 악령의 시점 숏은 물론이고, 만화적인

<다크맨>에서 다크맨이 분노를 발산하는 장면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하지만 <기프트>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갑자기

효과음이 끼어들고, 갑자기 끔찍한 화면을 삽입하는 정도에서 그쳐버린다. 아무것도 새롭지 않고, 어떤 것도 원숙하지 않다. 게다가 후반부에서는

너무나 한심하게, 모든 것을 단칼에 종지부를 찍어버린다. 영혼이 돌아와 여인을 구해준다는 설정이 그나마 눈에 띄지만, 새롭거나 눈부신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당한 성폭행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버디의 모습은, 공감이 간다. 어린 소녀를 괴롭히는 남자에게 갑자기 가해지는

그의 돌연한 분노도. <심플 플랜>에서 빌리 밥 손튼이 연기한 제이콥을 비롯하여, 샘 레이미는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공공연한 애정을

표현한다. 그런 ‘낮음’이 샘 레이미의 하나의 미덕이었다.

<기프트>를 보면서, 나는 괴로웠다. 한때 나는 샘 레이미를 좋아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다. 80년대 영화광의

필수 코스였던 <이블 데드>로 알려진 샘 레이미의 영화는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심플 플랜>까지는. 심지어 그 전의

<퀵 앤 데드>까지도. <다크맨>도 시대를 앞선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을 위하여>에 이어 <기프트>라니.

이건 너무 심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프트>를 보며 입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면서, 그래! <스파이더맨>까지만

기대를 걸자. 그리고 <스파이더맨>도 엉망이라면, 이제 샘 레이미라는 이름을 지워버리자. 리들리 스콧처럼 돌아올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더이상 기대는 하지 말자, 라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다분히 강제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아주 사적(射的)으로 샘 레이미에 대해 말할 생각이다.

지금 샘 레이미의 작품세계를 분석할 생각은 없다. 나는 샘 레이미의 영화를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버리기 싫다. 하지만 지금 샘 레이미의

모습은 영락없이 변절한 투항자의 외양이다. 나는 주류 할리우드영화를 혐오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영화들을 아주 좋아하고, 즐겨본다.

나는 그 영화들의 ‘순수한’ 오락성을 인정하고 즐긴다. 샘 레이미의 영화는 주류가 아니었지만, ‘순수한 오락’이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했다.

그래서 샘 레이미가 할리우드에 고용된다고 했을 때에, 오히려 기뻤다. 샘 레이미의 재능이, 무한한 자본과 만난다면 <배트맨>

같은 작품이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샘 레이미에게 미련이 남았다.

<이블 데드> 3부작, 스플래터 영화의 걸작

개인적으로 나는 코언 형제보다 샘 레이미를 더 좋아한다. 코언 형제와 샘 레이미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 한 영화 동지다. 코언 형제는 <크라임

웨이브>의 시나리오를 썼고 조엘 코언은 <이블 데드>에서 편집에 참여했으며, 샘 레이미는 <허드서커 대리인>에서

시나리오와 제2촬영팀 감독(Second Unit Director)을 맡았다. 코언 형제가 샘 레이미보다 훨씬 지적이고, 훨씬 세련되고,

훨씬 심오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샘 레이미의 경박한 쾌활함이 좋다. 82년작 <이블 데드>는 전형적인 공포영화다.

나무의 악령이 캠핑 온 청춘남녀를 공격한다는 뻔한 내용이지만, <이블 데드>는 익숙한 공포영화의 관습을 뛰어넘는 패기가 있었다.

<이블 데드>에서 악령의 시점 숏으로 잡아낸 장면은 샘 레이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숲 사이를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악령의 눈으로

보여지는 광경을 그대로 관객이 체험하게 만드는 것. 들리는 말로는 오토바이 앞에 카메라를 달고 촬영했다고 한다. 존 카펜터는 <할로윈>에서

살인마의 시점에서 보이는 영상을 잡아내면서 공포감을 고조시켰다. 샘 레이미는 거기에 ‘속도’를 가하여, 더욱 강렬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샘 레이미는 영화의 활동사진적 쾌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샘 레이미는 의도적인 과장과 슬랩스틱으로 관객을 자극하고,

등장인물들의 공포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것이 샘 레이미의 영화가 공포와 웃음을 함께 주는 이유다. <이블 데드3>는 공포영화이면서, 동시에 의도적으로 웃음을 주기

위한 코미디다. 하지만 <이블 데드2>의 위치는 애매하다. <이블 데드2>를 보고 있으면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리다가

갑자기 썰렁해진다. 내가 지금 제대로 웃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돌연 드는 것이다. 팔다리가 잘리고, 악령의 저주가 극한으로 도달한

지점에서도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 걸 생각하면 아연해진다.

하지만 모든 감정의 극한은, 어딘가에 통로가 있다. 아니 공명한다. 감정의 극한점에 다다른 순간 다른 감정의 일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3부작은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 스튜어트 고든의 <좀비오>와 함께 공포와

웃음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스플래터’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퀵 앤 데드> 이후, 뒤틀린 유머는 어디에?

발랄한 인디영화로 성공한 샘 레이미가 처음 주류에 가서 만든 <퀵 앤 데드>는 실패했다. 하지만 <퀵 앤 데드>를

졸작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퀵 앤 데드>는 기존의 서부극을 샘 레이미 특유의 가벼운 신랄함으로 반죽한 잡탕이다. 대단히 심각한

이야기지만, 어쩐지 보고 있으면 즐겁다. 오로지 복수만을 꿈꾸며 살아온 여성 총잡이, 총을 들기를 거부하는 총잡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결투를

게임처럼 생각하는 총잡이 등 <퀵 앤 데드>에는 전형적인 총잡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신선하다. 당시 가장 섹시한 여배우로

평가되던 샤론 스톤을 먼지구덩이에 몰아넣고, 호주에서 막 건너온 러셀 크로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힌다. 관습을 딱히 조롱한다기보다는, 자기

맘대로 비틀고 뒤집어서 만든 <퀵 앤 데드>는 샘 레이미의 서명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퀵 앤 데드> 뒤 3년간 영화를 찍지 않았지만, 그건 별다른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샘 레이미는 한편의 영화를 만들고 2,

3년 정도의 휴지기를 가졌다. 기간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심플 플랜>은 어딘가 묘했다. <심플 플랜>은 인디영화

시절의 동지였던 코언 형제의 <파고>에 대한 샘 레이미의 답변처럼 보인다. 두 영화의 인물들은 오직 눈만이 가득한 외딴 마을에서

죽고 죽이며 외로운 길을 걸어간다. 그런데 <파고>가 추악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그리면서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것에 비해,

<심플 플랜>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웃지 않는다. 아니 오로지 막막한 절망만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샘 레이미의 전유물이었던

뒤틀린 유머가 <심플 플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희한하게도 <사랑을 위하여>와 <기프트> 역시 마찬가지다.

샘 레이미의 전유물이었던 발작적인 웃음은 어디로 갔을까.

<퀵 앤 데드>는 그렇지 않았다. 샘 레이미는 좀더 크게, 화려하게 자신의 영화를 업그레이드했을 뿐이다. <퀵 앤 데드>가

흥행은 물론 비평에서도 낙제점을 받자 샘 레이미는 변했다. <사랑을 위하여>는 전형적인 스포츠 멜로물이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케빈 코스트너의 역겨운 영웅담을 아무런 ‘의식’없이 뽑아낸 공산품이다. <기프트>는

빌리 밥 손튼의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나리오를 그저 현란한 테크닉으로,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영화다. 그렇다면 <심플

플랜>은 무엇일까?

웃음과 함께 말라버린 재능

<심플 플랜>은 걸작이다. 빌리 밥 손튼의 연기는 최고이고, 샘 레이미답지 않은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아우라는 숨쉬기조차 힘들게

한다. 형제인 행크와 제이콥 그리고 제이콥의 친구 루는 눈덮인 숲 속에서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한구의 시체와 400만달러가

있었다. 마약상의 눈먼 돈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고심 끝에 돈을 챙기기로 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행기를 발견한 뒤에도 돈에 관한 이야기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 나누기로. 그들은 그 돈이 유괴범의 것임을 알고 안심한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웃을 죽이고, 내분이 벌어져

서로를 죽인다. 너무나 ‘간단한 계획’이었지만, 모든 것은 너무나 복잡하게 흘러간다. 걷잡을 수 없이 보안관도 죽고, 그들을 찾아온 유괴범의

형까지 죽자 동생은 형에게 말한다. 나를 죽여줘, 밤마다 현관 계단에 앉아 이 순간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기는 싫어. 형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에게 총을 겨누고, 남은 생을 살아간다.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가슴속에 더 무거운 어둠을 안은 채로. 그뒤로

과연 그에게 웃음이 있었을까, 행복의 순간이 재래할 수 있었을까.

그뒤 샘 레이미의 영화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어쩌면 형의 지독한 운명에서 샘 레이미는 자신의 미래를 본 것이 아닐까. 안식을 원한 동생과

참혹하지만 생존을 택한 형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혈육과 영혼을 내쳤지만 결국 안식조차 얻지 못한 형의 길로 간 것은 아닐까. 샘 레이미는

주류에서 스타를 기용한 ‘큰 영화’를 만들게는 되었지만, 그의 재능조차 말라버렸다. <기프트>는 자신의 재능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이야기다. 샘 레이미는 어떨까. 그도 자신의 재능을 미워하고 있을까? 재능을 정당하게 쓸 수 없음을 슬퍼하며, 아니 분노하며.

김봉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