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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드라마를 벤치마킹했나,<엘리어스>
2002-11-27

해외방송가

<엘리어스>는 비밀조직과 CIA 사이에서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는 ‘여대생’ CIA 요원 시드니 브리스토의 이야기다. 재학 중 갑자기 CIA가 되라고 접선을 받아 CIA가 된 시드니. 애인한테 자기 정체를 밝히는데 애인은 살해되고 만다. 이로서 알게 된 사실, 자기가 CIA라고 생각하고 몸담았던 곳은 일부 요원들이 ‘그림자 정부’식으로 만들어낸 ‘조직’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드니는 이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다시 ‘조직’의 하부조직인 SD6로 돌아가고, ‘조직’을 쫓는 CIA와 SD6 사이의 이중첩자를 자처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15세기의 램발디라는 사람이 작성한 ‘예언서’가 시드니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험담부터 시작해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엘리어스>는 정말로 주인공 캐릭터가 엉망이다. 주인공 시드니 브리스토는 문학전공 대학원생이면서 CIA와 비밀조직의 이중첩자라고 한다. 아주 바쁘게 산다. 그런 황당무계한 설정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시드니 역의 제니퍼 가너가 대학원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을 전공해서, 그만큼의 교양을 쌓고, 그만큼의 문학적 성찰을 한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옆에서 ‘쟤는 공부 잘한다더라’라고 말은 해주는데 우습게 보인다. 게다가 능력도 있고 실력도 있고 잘 빠지고 얼굴도 그럴싸한 여자가 늘 하는 짓은 남 앞에서 비굴하게 보여서 위기를 탈출한다. 정말이지 ‘김기덕 영화의 간도 쓸개도 없는 여자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OCN에서 <엘리어스> 예고편을 ‘여대생 CIA 시드니 브리스토의 좌충우돌’이라고 했던 것을 보고 너무 핵심을 꿰뚫어서 놀랐다. ‘여’대생. 여자는 대학생이 된 게 특별나단 소리다. 여류. 남자들 세상에 여자가 끼어들었단 얘기다. 시드니 브리스토는 정확하게 여대생, 여자 스파이밖에 되지 못한다. 드라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시드니 브리스토는 주인공이 아니라 구경거리다. 시드니의 변장은 변장이 아니라 패션쇼라는 것은 삽입곡이 증명한다.

이야기도 주인공 못지않게 허무하다. <와호장룡>도 아니고 몇백년 전의 비급을 놓고 CIA와 FBI, 비밀조직이 싸우지를 않나. 탈출시에 중력법칙은 무시하기 일쑤이다. <엘리어스>가 <스타워즈>의 부녀판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압권이다. ‘내가 니 아비다’ 부녀판 패러디에 이르고 나면, 굉장히 진지한 톤을 유지하려 하는 이 드라마가 알고보니 허풍을 기본으로 하는 007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리어스>의 허술함은 의외로 쉽게 발견된다. 보통 ‘스페인’ 하고서 한 교회에서 활약을 하는데, 그 교회 안에서 상대 스파이와 치고받고 싸우고서 문을 나가면 그새 ‘LA’다. 건물만 벗어나면 나라를 건너오다니 <더 원>의 제작자들이 돈이 없어서 집에서 도망친 뒤 자동차 추격전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첩보물에서 공항검색 시스템을 무시한다는 것은 코미디가 아닌 드라마에서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일까 게다가 차를 타고 물 속에 빠진 우리의 주인공, 타이어의 바람을 이용해서 숨을 쉰다. <CSI>만 열심히 봐도 타이어 바람빼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는데, 뻥을 아주 태연자약하게 한다. 물론 <CSI>를 시청도 안 한 우리 아버지가 이 장면에서 하시는 말씀, “타이어가 불량품이군!”

그러나, 이토록 한심한 설정을 격파하는 것이 있으니 전체적인 그림이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 제작자의 능력이다. 이야기를 한참 진행하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야기를 끊어버려서 사람의 애를 태우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는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사실 <엘리어스>의 진짜 재미는 바로 이 <클리프행어>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시드니의 아버지 잭에는 빅터 가버, SD6의 대장 슬론 역은 론 리프킨 등 연기에 잔뼈가 굵은 배우들을 제니퍼 가너 옆에 붙여줘서 어설픈 연기를 감춰준다. 그리고 램발디의 말도 안 되는 ‘예언’을 논할 때마다 에이미 어빙, 테렌스 퀸같이 (특히) 목소리가 엄청나게 압도적이고 설득력 있는 배우들을 데려다놓는다. 주인공이 아무리 어설프고 내용이 어처구니없어도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받쳐주니 왠지 그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그냥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엘리어스>가 우리나라를 분석하고 따라한 것일까 너무나 한국 드라마와 비슷하다. 연속극 방식, 구시대적이고 허술한 인물, 상식을 벗어나는 스토리, 자기 나라 국민 이외에는 생각도 없는 지나친 자기합리화와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순간순간을 넘기는 이야기 다음편이 궁금하고 조연들이 이야기를 받쳐주고 여주인공은 연기력과 상관없이 날씬해서 본다.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와 너무 비슷한 패턴 아닌가 <엘리어스>는 아무리 허풍의 연속이어도 위 규칙만 지키면 온 국민이 다 용서하고 시청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규칙 한도 내에서는 최상급의 드라마임이 틀림없다. 열심히 보는 나 자신을 돌아볼 때.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