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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한국은 없었다 - <007 어나더데이>미국현지시사기
2002-12-09

남북한을 주무대로 했다고 알려진 영화 에서 남한은 없다. 분명 스토리는 남북한 대치상황을 전제로 한 것임에도 그렇다. 북한의 무기와 다이아몬드 밀매를 파헤치기 위해 북한 땅에 잠입했다 신분이 들통난 제임스 본드가 14개월동안 고문당한 뒤 휴전선에서 남북한 포로 교환으로 풀려날 때도, 영화의 막바지에서 한반도의 허리가 북한의 레이저 빔 공격으로 불바다가 될 때 남쪽 비무장지대의 지휘소 본부에도, 분명 있을 법한 남한의 책임있는 지휘자는 한명도 없다. 남한 사람이라고는 우리 땅의 운명을 놓고 목소리를 높이며 작전을 내리는 영국 정보요원과 미군의 들러리 역할을 하는 헌병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땅의 운명은 오로지 제임스 본드와 영국 미국 정보요원들의 처분에 달려 있다. 그러면 북한은 어떤가. 영화 속의 주적은 외국 유학을 다녀온 고위층 자제 문탄순(윌윤리)와 자오(릭윤)다. 고급 스포츠카 수집이 취미인 이들은 전세계의 다이아몬드를 끌어모아 인공위성에 설치한 뒤 거기서 나오는 강력한 레이저 광선으로 지구를 불태워버릴 야욕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 이런 첨단기술 강국 대접을 받을 정도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주인공들은 쿠바에서 DNA 이식수술로 얼굴을 바꾸고(때문에 윌윤리는 5분 정도 출연한 뒤 백인 배우로 교체된다) 영국의 귀족으로 행세하다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얼음호텔 기지로 날아다닌다. 평소에도 맘에 안드는 부하들을 샌드백에 넣어 두들겨패는 걸 취미삼는 사디스트 문탄순은 결국 세계 정복에 반대하는 아버지 문대령마저 쏴죽이는 패륜아가 된다. 영화 초반 붙잡힌 제임스 본드는 북한땅에서 무려 14개월 동안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 머리가 자라 예수 같은 모습으로 풀려나지만 악랄한 고문과 함께 들려오는 북한 사투리를 정신적인 상처로 가지고 있다. 영화 속에 분명 북한은 존재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악의 축’ 혹은 ‘악의 정수’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형수술이 잘못돼 대머리에 얼굴에 큰 상처를 가진 채 계속 등장하는 사이보그 같은 릭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흉측하다. 이것이 북한의 이미지다. 영화 속에서 북한은 단지 강력하고 무자비하고 끔찍해서 쳐부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적이다. 한번 눈에 불을 켜고 보면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영화 내내 계속 깔리는 북한 사투리만큼이나 신경을 제대로 썼더라면, 마지막 신 불상이 있는 절 안에서 제임스 본드와 할리 베리가 임무를 완수한 뒤 나누는 달콤한 섹스 같은 건 당연히 없어야 했다. 어느 동양 사람이 이걸 보고 맘 편해할까. 소심한 사람들은 북한땅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제임스 본드가 문탄순을 폭포로 빠지게 한 뒤 자신은 사찰의 종에 매달려 “종소리 덕에 살았다”고 농담하는 것도 불편해할 텐데. 제임스 본드와 할리 베리가 헬리콥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땅에서 지켜보는 남한의 소를 모는 농부의 모습은 그나마 애교로 봐주어야 할 정도. 이 모든 게 그저 영화 한편일 뿐인데 하고 보고 넘길 수 없는 건 미국 사람들의 단순한 국수주의와 다른 나라에 대한 무지, 그리고 전쟁을 부추기는 정부 사이에 이런 영화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공적이 필요한 정부가 국민들에게 뿌려놓는 모호한 외부의 적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채, 미국이라는 나라 외에는 도무지 관심이나 지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곳 사람들에게 손쉬운 미디어로서의 액션영화들은 그런 공적에 대한 강력한 교육방식으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라크 같은 나라에 대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액션영화 속에서 본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은 러시아인에게 혹은 아랍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북한 사람들에게도 영화 속 테러리스트들에게 키워왔던 막연한 두려움과 분노를 현실에서 혼동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영화처럼 뚜렷이 북한을 부각시킨 는 미국 내에서 북한이 주적이라는 대중의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확산하는 길을 여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또한 개봉 첫주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세계적으로도 흥행이 예상되는 이 영화를 우리가 마음 편하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LA=이윤정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