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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찾은 미국 독립영화감독 롭 닐슨(Rob Nilsson)
2002-12-11

“우리를 위한, 우리에 대한 영화”

다이렉트액션시네마(Direct Action Cinema, 이하 DAC). 특별히 어려운 단어 하나 없지만 어쩐지 생소한 이 용어는, 물론 장르로서의 액션영화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액션시네마’와 액션영화를 말할 때 쓰이는 ‘액션무비’의 미묘한 어감의 차이만큼, 각각의 ‘액션’도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후자가 싸움 혹은 행동의 의미라면, 전자는 연기의 의미에 가깝다. 남들보다 서너발은 빠른 70년대에 비디오카메라를 잡고, “누구나 일상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영화의 장점을 파악했던 롭 닐슨은 간단한 줄거리를 축으로 배우들의 즉흥성을 최대한 살리는 ‘직접적인 연기의 영화’ 스타일을 개척해온 감독. 한발 더 나아가 샌프란시스코 빈민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연기 워크숍을 하면서, 그들을 배우로 등용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온 미국의 독립영화감독이다.

디지털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닐슨은 올해 레스페스트영화제의 게스트로 서울을 다녀갔다. 1940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가 다큐멘터리 감독인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약 3년간 아프리카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만 해도 영화감독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시인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그가 카메라를 잡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 좌파영화그룹 시네 마니페스트를 만들어 노동자, 농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부터. 이때 찍은 일련의 다큐멘터리 중 20세기 초 미국 다코타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노르웨이 이민자 농부들의 힘겨운 투쟁의 연대기 3편이, 데뷔작 <노던 라이트>의 토대가 됐다.

존 핸슨과 공동 연출한 <노던 라이트>는 7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비평적 찬사와 함께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면서 닐슨을 널리 알린 작품. 하지만 화사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차기작에 투자할 프로듀서를 찾지 못한 채 3년을 보내야 했다. 그때 그가 찾은 답이 바로 저렴한 비디오와 ‘DAC’, “할리우드 스타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우리를 위한, 우리에 대한 영화”였다. “가장 인간적인 감독” 중 하나라는 존 카사베티스를 영화적 스승으로 삼고, “돈으로 감독의 정신을 사고파는 할리우드는 식민지 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끔찍한 사회”라고 비판하는 그에게 디지털은 ‘가능함의 예술’(art of possible). 디지털카메라는 “어느 나라, 어느 공동체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되고,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만들고 노트북만 있으면 커피숍에서도 간단히 편집을 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TV뉴스가 사람들에게 현실을 전할 만큼 현명한가” 하고 미디어 권력에 회의적인 반문을 던지는 그는, “독립적인 화자들의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샌프란시스코 택시 운전사들의 밤이라는 설정을 두고 전문, 비전문배우들과 어울려 캐릭터들의 전사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때로 비상 신호인 ‘시그널 7’이 발생하곤 하는 그들의 일상과 즉흥에 가까운 대사를 좇는 83년작 <시그널 7>은 ‘DAC’ 스타일로 만든 첫 영화. 아프리카 부족간에 일어났던 비아프라 전쟁을 찍던 당시의 참상, 연인의 변심에 대한 의심이라는 두 가지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진작가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인 <히트 앤 선라이트>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역사와 개인의 상흔, 주인공의 정신적 치유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히트 앤 선라이트>로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뒤, 닐슨은 91년에 텐더로인 액션그룹(지금의 텐더로인 와이그룹)을 설립해 주민들과의 연기 워크숍 및 영화 동업을 계속 해오고 있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 내기 당구의 달인인 양아들, 그에게 위험한 내기 당구 시합을 붙여주려는 친아들간의 미묘한 갈등이 뒤얽힌 <초크>, 경찰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 심리로 망나니 폭주족처럼 살아가는 아들을 담은 <스킴> 등 텐더로인 와이그룹과 함께하는 영화들은 종종 심심할 만큼 일상적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인물들의 감정 속에 느리게 녹아들면서 문득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지금은 정치적인 신념보다는 사람, 인간을 믿는다. 그 추한 가능성과 믿을 수 없는 미묘한 동물적인 삶, 생명력을.” 배우와 감독과 촬영 및 음향 스탭들이 ‘역동적인 재즈 앙상블’처럼 화음을 이루고, 정해진 ‘시나리오의 재창조’가 아니라 그들 삶의 우물에서 길어올리는 ‘그때그때의 창조’를 즐기는 이상, 이 노감독의 카메라에 담길 이야기가 마를 날은 아마 오지 않을 듯하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