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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열리는 장 뤽 고다르,그 여백의 영화세계 <3>
2002-12-12

썩은 세상,나는 영화를 가지고 싸운다

3. 싸움, 끝나지 않을 싸움

고다르야말로 영화를 재발명한다. 현실에의 눈, 극들 사이의 가공된 긴장과 포장 대신에, 투박한 실제를 집어넣는 것. 샹젤리제는 아름답지 않다. 거기에 있을 뿐이다. 고다르는 카메라한테서 삶을 해석하고 만들어내는 눈을 제거하고 그에게 대신 현실의 이완된 느슨함, 느닷없음, 모호함, 거칠음을 포착하는 눈을 제공한다. 그래서, 바로 이 점에서 모든 것이 고다르로부터 달라진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따라서 위대한 작품이 아니다. 감독을 위대하다고 할 때의 그 위대함은 고다르와는 전연 상관없다. 그는 영화라는 도구의 두 번째 발명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여기서 시작한다. 그는 작품이 없다. 우리가 흔히 다른 것들에 붙이는 이름으로서의 작품이란 그에게는 없다. 그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이야기이고, 의미이며, 텍스트라면, 그는 그 경계 바깥에 있다. 완전히 바깥 말이다. 그는 그 영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는 것은 ‘영화’라는 도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며,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현실을 보고,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영화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이다.

시네마 밀리탕, 참여영화, 투사 고다르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정치적이라고 틀리진 않지만, 우리가 흔히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잣대와는 상관이 없다. 그는 현실적이며, 현실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조각내며, 그것을 잇고, 따라서 그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현실을 보는 ‘눈’을 생각한다. 그 ‘눈’의 정체성을. 눈, 바로 그것이 영화이며, 영화들이다. 현실에서 어긋난 조각이 있다면 고다르는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지 않겠는가 그는 고발자, 기록자, 폭로자이기 때문이다. 눈의 역할, 현실의 기록, 증인.

60년대에서 70년대초까지 그렇게 이어진다. 그는 계속 사색이다. 일반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바라보며, 그것과 현실/세상의 관계를 추적하기 때문에, 그는 사색이 될 수밖에 없고, 그의 영화는 사색하는 방법이며, 시도들이다.

한꺼풀이 지나갔다. 고다르의 말: 나는 사십을 넘어 오십에 다가간다. 나는 끝났으며 행동의 시간은 지났다. 사색이 깊어지며, 용도에 대한 깊은 시선이 따라오며, 세밀한 포착들과 익어가는 과일… 그는 비디오를 만났다. 비디오, 움직이는 이미지의 새로운 모습. 정보와 정보의 전달. 그래, 움직이는 이미지는 소통수단이구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무엇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여전히 그는 할리우드를 좋아한다. 그는 영화들이 인간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시 이 공식화된, 클래식의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자신의 특허대로 한발 더 나아가는 것.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 무엇을 소통하려 하는 의지를 담고, 그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장면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소통 자체의 문제들, 둘 사이를 가르는 강, 틈새를 확인시키는 것. 그렇게 나아간다: <프랑스, 돌아보기, 우회하기, 두 어린이들> <원 플러스 원> <넘버 투> <여기와 저기> <닥티 보고서>….

싸움꾼 고다르. 그는 언제나 하나로부터 나오는 두 방향의 싸움꾼이다. 현실을 보는 방법으로서의 영화로의 싸움, 그러다보니 보게 된 현실의 살아가는 방법의 모순에 대한 싸움. 어디서도 힘겨운, 지치는 싸움. 몸은 늙어가고 싸움은 끝나지 않고… 그는 외로움이다. 스산하며 우울한 풍광. 영화와 현실을 멜랑콜리라고, 우울함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점점 더 클래식조차 벗어나 현실을 지워버린다. 기술과 광고와 포장에 의해서… 현실은 어디에서고 조명되지 않고, 그저 지나가며 사라진다. 거기에 있는 이 외로운 눈, 영화, 고다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낀 자신. 지금 지금은 무엇을 하냐고 그는 여전히 싸운다. 그가 싸우는 방식은 간단하다. 영화를 만드는 것, 사색하는 것. 늙었으므로 그는 매번 마지막처럼 이 스산함을 풍긴다. 하나라도 그것을 느끼고, 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어색함을 느끼고, 현실을 보고 조명하는 ‘눈’을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고 매번 마지막을 짜아낸다(자아낸다 짜낸다). 백미는 자화상이며(<고다르에 의한 고다르>), 이데올로기의 종결에 관한 초상이며(<독일 90 >), 영화의 초상이다(<영화의 역사 그리고 이야기들>). 경탄할 만한 것은 모차르트의 꿈을 보는 것이며(<포레버 모짜르트>), 눈물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다(<사랑의 찬가>). 마지막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선회했다. 자신의 입으로 읊조리며 영화와 세상을 보여준다. 보세요. 여기 세상이 있고 영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여백의 영화가 아닌가 난무하며, 서로가 자신이야말로 텍스트, 진짜 텍스트라고 묵직한 문체로 쓰여진 종이 위의 그 텍스트들의 전쟁을 둘러싸고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백, 여백 위의 영화. 영화가 있고, 영화가 있어왔으며, 영화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에 대한 영화. 이야기가 있었고, 이야기가 이어져왔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화이며, 그 영화를 다루는 또 하나의 영화. 고다르는 언제나 바깥에 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찰자이고, 이십세기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자이며, 보고자이고, 그 감동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 슬픈 자, 스산한 풍광. 그는 그래서 다르다. 다른 자들과 다른 길에 서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위대하다는 표현을 쓸 수 없으며, 그는 작가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그 바깥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자이다. 마치, 안토니오니가 어느새 구름 저편에 있는 존재가 되었듯이…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스산한 가운데서도 <사랑의 찬가>를 부를 줄을 알며, 부르며, 세상을 보기를, 그것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감탄하고, 감동받으며, 동시에 자꾸 고치려고 하며, 몸을 움직이며… 늙은 고다르, 사라져가는 고다르, 그래서 계속해서 마지막을 만드는 고다르, 그 움직임. 그는 싸움을 쉬지 않는다. 전혀 쉴 생각이 없다. 영화는 병을 고치는 도구라고 철저하게 믿기 때문에, 그리고, 세상이 아직도 거기에 있고,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기에…>(Nous sommes tous encore ici…).김성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강사 imagia@lycos.co.kr

고다르의 러브 스토리들

지가 베르토프 그룹에서 함께 작업했던 장 피에르 고랭과 왜 헤어지게 되었냐는 질문에 고다르는 “그와의 관계는 결혼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랭은 그것을 “러브 스토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어떤 결혼도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건 아니면 비유적인 의미에서건 고다르의 필모그래피(곧,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그처럼 ‘결혼’ 혹은 ‘러브 스토리’라고 표현할 만한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 몇 있다. 동거기간의 길고 짧음을 떠나 그의 영화들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소개해본다.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1924∼)가 고다르를 만난 것은 뒤에 누벨바그의 간판 제작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조르주 드 보르가르를 통해서였다. 이전에 쿠타르는 <파리 마치>와 <라이프> 같은 잡지의 사진기자 일을 했었다. 이처럼 포토저널리즘에 종사했었다는 그의 직업적 배경은 고다르의 미학적 요구와 잘 맞아떨어졌다. 쿠타르는 <네 멋대로 해라>와 그 밖의 고다르 영화들에서 잘 드러나듯, 핸드헬드 촬영, 유동적인 카메라 움직임, 급작스런 패닝, 자연광 처리와 같은 테크닉에 아주 능했고 이것들은 로케이션 지향적인 촬영에도 꼭 들어맞았다. 67년작 <주말>로까지 이어진 쿠타르와 고다르의 협업관계는, 고다르가 정치적 견해에서나 미학에서나 점점 더 급진적인 태도를 갖게 되면서 끝나버렸다. 1970년에 쿠타르와 같이 작업할 것이냐는 질문에 고다르는 매정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쿠타르는 반동적인 인간이라 그와는 같이 작업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할말이 없다.” 이 둘의 재회는 두편의 80년대 영화, <열정>(1982)과 <카르멘이란 이름>에 와서야 이뤄진다.

덴마크 출신의 안나 카리나(1940∼)는 열여섯살 무렵에 골치아픈 가족(문제)이 싫어 무작정 파리로 왔다가 우연히 모델 일을 하게 된 인물이었다. 사진들 속에서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본 고다르는 그녀에게 자신의 첫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해보겠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카리나는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에 고다르의 ‘프로포즈’를 수락하지 않았다. 카리나와 고다르의 실제적인 만남은, 고다르가 앞으로 자신의 뮤즈가 될 여인에게 <작은 병정>이란 영화에 출연해보지 않겠냐고 재차 물어보면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정치적 영화”라 카리나는 옷을 벗을 필요가 없었고 결국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작은 병정>의 제작이 채 끝나기 전에 결혼한 두 사람은 <메이드 인 USA>(1966)까지 모두 일곱편의 영화를 함께하면서 페데리코 펠리니-줄리에타 마시나의 협업관계만큼 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어도 영화적 성취에서는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탁월한 듀엣관계를 보여주었다. 카리나가 출연한 영화들 속에서 고다르는 그녀에 대한 감정, 사랑의 환희와 비틀거리는 관계에 대한 좌절감 등을 알게 모르게 표현해냈다. 그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고다르-카리나 관계에 대한 일종의 비유 혹은 심지어는 ‘다큐멘터리’로까지 이야기될 정도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67년 이혼하고 만다.

1971년 6월, 고다르는 교통사고를 당해 큰 부상을 입는다. 이후로 그는 꽤 오랜 기간의 재활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옆에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안 마리 미에빌르(1945∼)였다. 전직 가수였다가 <만사형통>에서 스틸 사진을 담당했던 그녀는 이후 <여기와 저기>(1975)를 본격적으로 함께 작업하면서 고다르의 훌륭한 파트너(영화적으로, 또 개인적으로)가 되었다. 이후 고다르 영화의 크레딧에는 그녀의 이름이 정말 자주 등장한다. 자신의 영화들을 만들기도 하는 미에빌르는 고다르 영화의 공동감독인가 하면 (공동)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고 제작자, 편집자, 아트디렉터 등이기도 하다. 이 둘의 창조적 관계는 그들 못지않게 위대하고 급진적인 시네아스트들인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그것에 비길 만한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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