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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아시스> <죽어도 좋아>에 등장한 `타자`성 <1>
2002-12-13

타자와의 기꺼운 조우

지난 3월에 있었던 <집으로…> 시사회 날, 주연배우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사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김을분 할머니는 70평생 한번도 극장에 오신 적이 없습니다. 할머니가 처음 극장에서 보시게 된 영화가 자신이 주인공인 바로 이 영화입니다.”

이 짧은 코멘트는 뭉클한 데가 있다. 이 코멘트의 감동과 <집으로…>라는 영화의 감흥을 떼놓고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이 코멘트에 담긴 사실을 알지 못한 관객이라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이미지에서, 그가 영화 혹은 한국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장의 밖에 존재해왔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의 할머니는 한국영화가 외면해왔던 혹은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잊으려 했던 존재와의 조우를 체험케 한 영화였다. 그리고 차례로 공개된 <오아시스>와 <죽어도 좋아>에서 그 조우는 계속됐고, 이것은 2002년 한국영화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남았다.

타자들, 한국영화의 부적격자들

<집으로…>와 <죽어도 좋아>의 주인공들은 노인이며 <오아시스>의 주인공은 사회적 부적격자와 장애자다. 세 영화 모두 작품성에서 국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제 막 개봉한 <죽어도 좋아>를 빼면 관객과의 만남도 성공적이었다. 이 사실을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는 방식은 한국영화의 성공적인 소재 다양화, 혹은 캐릭터 다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세 영화가 한국영화의 일반 경향과의 일종의 단절로 느껴지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단절은 한국영화가 배제하거나 주변화해왔던 존재를 중심화하는 데서 오는 윤리적 각성을 동반한다.

1990년 중반부터 한국 관객과 갖가지 매체들은 새로운 한국영화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 새로운 한국영화는 젊은이들의 놀이터였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인물도 그걸 보는 사람도 젊은이들이었다. 혹은 젊음으로 표상되는 육체적 정신적 자질을 지닌 주체였다(이건 대중영화뿐만 아니라 작가주의로 지칭되는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남아 있는 <오발탄>과 <하녀>의 주인공이 중년 남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 경향은 확실히 강력한 편향으로 보인다. 1990년 중반 이후의 한국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을 제외하면 산업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청년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다).

이 세대적 폐쇄성은 한국영화가 지닌 윤리적 결핍이었다. 레이브 파티(Rave Party)라면 전혀 문제되지 않을 이 윤리적 결핍은, 영화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놀이인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하고 확장하는 주요한(어쩌면 가장 중요한) 담론의 장이 돼버렸으므로, 잠재적인 결핍으로 남는다. <집으로…>를 비롯한 세 영화의 특별한 주인공들은 텍스트상의 기능을 넘어, 그들의 실존이 한국영화의 결핍과 허기를 상기시키고 달랜다. 요컨대 한국영화는 이 영화들을 통해 자신의 타자들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세 영화가 모두 멜로드라마라는 점을 짚어야겠다. 멜로드라마는 남녀관계를 포함해, 주요 인물들간의 사적 갈등과 포옹의 경로를 내러티브의 축으로 삼는다. 멜로드라마는 가장 사적인 장르이며, 관객과 소통하는 데 극중 캐릭터와의 동일시의 힘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장르다. 이 장르에서 캐릭터의 관습을 버리는 일은 관객과의 교감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매우 모험적인 시도이다. 세 영화는 그 모험의 방식과 경유지에서 모두 다른 길을 가고 있으며 서로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집으로…>, 스크린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타자성

<집으로…>의 주인공인 할머니는 70대로 추정되며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다 허리는 굽었고 귀마저 먹었다. 그가 사는 곳은 산골 외딴집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이정향 감독은 배우의 실제 모습보다 훨씬 더 늙고 추하게 김을분 할머니를 분장케 했다. 이건 감독으로선 어려운 결정이다. 이 영화가 전하려는 순정한 정신적 유대에 어떤 육체성도 가담치 않게 하려는 결단이다. 예컨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주인공은 여성적 매력이 별로 없는 인물로 설정돼 있지만, 그 역을 맡은 배우 르네 젤위거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라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대중영화의 캐스팅에서 이런 종류의 트릭은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집으로…>의 할머니는 그런 방식으로 타자성을 가장하지 않는다. 그의 타자성은 스크린 안에서 온전하게 구현된다.

그러나 그가 타자로서 온전할수록 우리가 그와 교감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그런 노인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를 스크린의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게 과연 가능할까. <집으로…>가 이 추레한 할머니라는 타자를 수용하는 방식은 관객의 대리인인 아이(상우)가 할머니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 설득의 과정은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이루어진다. <집으로…>에서 설정되는 노인-시골-자연/아이-도시-문명이라는 대립항은 매우 낯익은 것이다. 20세기의 많은 영화가 그래왔듯 <집으로…>는 전자가 후자에 감화되는 코스를 밟는다. 모성과 자연이 문명의 결핍을 일깨우는 것이다.

<집으로…>가 모성과 자연에 관한 기성의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일부 평자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할머니의 헌신성, 산골 마을의 안온함은 낯익은 모성 신화와 소박한 자연주의에서 멀지 않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두 인물의 포옹 혹은 할머니라는 타자의 수용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집으로…>엔 일정한 퇴행성이 있다. 그러나 <집으로…>에는 매끈한 주류 드라마가 도달하지 못한 생기가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생기는 만듦새의 결함에서 온다. 주인공들의 연기는 정제돼 있고 에피소들은 정교하게 배치돼 있지만, 산골 아이들과 읍내 주민들의 연기는 박자가 맞지 않고 대사는 교과서처럼 발음된다. 이 결함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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