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2002-12-20

바람이 부네,나는 살아있네

그대의 손, 그 불타는 기억들을내 부드러운 손 위에 얹고생명의 온기로 충만한 그대 입술을내 갈망하는 입술에 맡기라.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마치 낙엽에게 그러하듯이.- 포루그 파로흐자드(1935∼1967)

길. 태초에 빛이 있었듯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는 길이 있었다. 그의 많은 영화의 시작이 길이었다. 차창 밖의 저편에 놓인 길이든, 신의 눈길같이 먼 거리에 잡힌 길이든, 이란의 비포장길에는 키아로스타미의 주인공을 실은 차가 달린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면제를 먹은 중년 남자가 자신의 시신을 묻어줄 사람을 찾으러 떠났던 <체리 향기>의 길, 영화 촬영을 위한 설렘을 안고 차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뗄 줄 모르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길. 그리고 신의 꿈보다 더 푸른 오솔길을 지나 검은 계곡에 위치한 하얀 마을에서 일어날 이국적인 장례식을 촬영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의 길. 그러기에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길이란 수미쌍관의 두운과 각운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영화를 한편의 시로 만드는 존재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벽돌공이었던 호세인이 부잣집 딸인 테헤레에게 청혼했을 때, 이윽고 현실에서 서서히 풀려나는 실타래처럼 모든 사회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과의 거리를 풀어버린 길은 아롱다롱한 혼인길이 되었다. ‘꿈같은 약속보다 지금이 좋다네’라는 시를 읊조리는 늙은 의사가 유유자적하게 오토바이를 타는 <바람이…>의 밀밭길은 그때까지 숨겨놓았던 이승의 천국이 무엇인지를 화면 한가득 펼쳐놓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이승의 삶의 비밀을 알아버린 길들은 더이상 이 세상의 길이 아니게 된다.

바로 그 길 위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유일한 인공수단인 차는 ‘합목적적인 어떤 것’을 위해 도시를 떠난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차는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주인공 그 자체일 것이다(실제로 주인공 베흐저드는 마을의 꼬마 파흐저드에게 “차도 사람과 같지.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차려야 돼”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얼굴을 자해하며 슬퍼하는 여자들을 담기 위해 길을 떠나는 베흐저드가 그렇게 합목목적인 존재인 것처럼. 그가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을 찾기 위해 길을 헤맨다는 사실, 그리고 마을 안에서도 우유를 찾기 위해, 휴대폰이 잘 터지는 높은 곳을 찾기 위해 빙빙 돈다는 것은 그가 사실은 이방인이며, 코에 건 안경이 말해주듯이 근시안이며 그 혼자 유일한 미로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준다. 그리하여 포도즙을 찾기까지, 풀어헤친 여인의 가슴 같은 대지의 길을 찾기까지, 키아로스타미의 관객은 다시 한번 많은 것들을 숨겨놓은 꼬불꼬불한 마을의 길들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소통, 반복되는 혼동

베흐저드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고 나무둥치 하나로도 다리가 되는 산골마을의 장례식을 촬영하기 위해 산골에 와서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려 든다. 그가 전화국 직원으로 위장하고 죽음쪽으로 얼굴을 돌려 있을 때 혹은 장례식의 촬영에 골몰해 있을 때, 그의 시점숏으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죽어가는 여인과 마을의 아이를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이라는, 인간에게 내려진 신의 호출을 기록하려는 욕심을 가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대전화라는 소모적인 인간의 호출에 더 집착하는 듯 보인다. 베흐저드는 끊임없이 지프를 몰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휴대전화가 터지는 유일한 장소인 무덤가 언덕들을 향해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아니 많은 이란영화의 특징인 이 반복의 도돌이표는 사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우리의 사랑스런 아마드가 네마자데의 숙제장을 돌려주기 위해 하는 반복과는 뉘앙스가 달라 보인다. 모든 헛된 헤매임이자 순환되는 자연의 법칙과는 거리가 먼 베흐저드의 반복은 이 마을에서 그의 고립과 의사소통의 부재를 가져올 뿐이다. 그는 절대 우유를 얻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 그가 전화국 직원이라고 했을 때 마을의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왜 전화국 직원이 필요한 거죠”

이 마을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 그것은 검은 계곡이란 뜻을 지닌 시어 다레(마을 이름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휴대전화라는 기계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는 베흐저드와 달리 그곳에서 얼굴이란 곧 스스로를 드러내는 소통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이라는 폐허에 맞서서 이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소통의 근원을 파괴하여 자신을 유폐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베흐저드가 수염을 깎을 때, 관객은 자신을 향해 말하는 베흐저드를 불편한 심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열심히 수염을 깎고 비누거품을 털어내며 우유를 부탁하는 베흐저드는 실상 부탁을 하는 대상인 마을의 여인과 전혀 시선 교환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주인공인 베흐저드에게 시선을 빼앗긴다면 관객 역시 이 사실을 깨닫기가 힘들다).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는 스스로 거울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완벽하게 베흐저드의 이기적인 시선을 포획한다.

베흐저드는 계속 혼동을 한다. 임신을 했던 여주인이 몸을 풀었는데도 그녀의 얼굴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의 동생이라고 착각한다. 이러한 소통과 혼동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네마자데의 집을 여긴가 저긴가 혼동할 때, 지진으로 25명의 친척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호세인이 죽은 친척을 자꾸 65명이라고 호명할 때, 그 순간은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영화라는 인공이, 허구가 자연을, 현실을 침범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키아로스타미의 의도된 거리두기이자 관객을 향한 물음 혹은 냉정한 통고일 것이다. 허구가 실제를 대신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주인공들은 또 다시 시시포스의 마을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베흐저드는 아직도 모른다. 휴대전화가 터지는 언덕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하늘보다 훨씬 낮은 곳이라는 사실을.

그 마을의 언덕에서 베흐저드는 가짜 전화국 직원이 아닌 진짜로 마을의 소통을 위해 3m 깊이의 구멍을 파는 남자를 만난다. 마을 처녀와 애인 사이인 남자는 오직 외화면의 목소리로 나타날 뿐이다. 마을 자체가 계곡 속에 숨겨져 있는 이 마을에서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숨겨져 있다. 우유를 짜는 염소조차도 지하에 숨겨져 있다. 풍화되어가는 느린 시간의 숨김 속에 그렇게 마을은 존재한다. 베흐저드는 더이상 일이 진척되기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야 비로소 죽어가는 여인이 아닌 마을의 배경, 혹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말똥을 굴리는 벌레, 쉼없이 자기 길을 가는 거북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는 거북이를 뒤집는 심술을 부려보지만, 서서히 깨닫게 된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자신만의 시간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노파에게는 작별의 시간이 있는 것이고, 말똥구리에게는 말똥구리의 시간이, 거북이에게는 거북이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베흐저드의 눈에는 느리게만 보이는 그 시간이 그들 안에서는 살아 있는 시간이었고 자신의 시간이었고 최선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생의 비밀

그때서야 베흐저드와 꼬마 파흐저드는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소통하게 된다. 베흐저드는 파흐저드에게 자신이 나쁜 사람인가 물어보고 키아로스타미는 이 둘을 액션 리액션 숏으로, 처음으로 잡아낸다. 헐리우드의 관습적 환영주의를 조장하던 액션 리액션 숏은 비로소 똑같은 눈높이로 눈을 맞추게 된 베흐저드와 파흐저드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영화형식을 취한다.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처음으로 진정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구덩이를 파던 청년을 구하게 된 뒤, 낮장면만이 가득하던 마을에 처음으로 밤장면이 깃들고, 차창 밖의 그의 시선에는 강아지가 뛰놀고 소가 거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보인다. 베흐저드의 뒤로 끊임없이 풀을 나르는 아낙네가. 양들을 모으는 목동 소년이. 교미를 하려고 달려드는 염소떼가. 이 무심코 끼어든 것 같은 배경은 마침내 어떤 진실에 수렴하게 되는데, 기실 이 마을에서 아무 일도 안 하는, 죽어 있던 유일한 사람은 베흐저드뿐이었던 것이다.

딥 포커스를 거부하면서 가장 평범한 숏들에서 결국은 세부에 대한 매혹과 진실을 일깨우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만들기는, 왜 많은 영화평론가들이 <바람이…>가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집대성이라고 평가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자기 반복의 복제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시적이고 간명한 영화는 그 자체가 한편의 시이고 노래이다. 이제 이 이란의 늙은 거장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일까

<바람이…>는 죽음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며 얻은 키아로스타미의 자각, 기호라는 필터를 통한 이미지의 재현을 지나 사물 그 자체의 현존에 도달하고자 하는 키아로스타미의 진심이 담겨져 있는 영화이다. 그리하여 베흐저드가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한 뼈를 강물에 버릴 때, 죽음의 기호나 오래된 골동품이 아닌 그냥 인간의 뼈가 강물에 흘러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볼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바람은 우리를 건네주리라는 것을. 시간의 풍화 속에 삶의 머릿결을 드리우고 그 빗질을 받아들여 늙어가리라는 것을.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