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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드라마에서 만나는 두 여자의 삶
2002-12-24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내 사랑 누굴까>KBS2 매주 토·일저녁 7시50분

같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너무나 대조적인 삶을 사는 두 여자가 있다. 그들의 일상이 주말마다 속속들이 중계되는 까닭에, 모르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30대 초반으로 나이도 엇비슷한 두 여자 중 한 여자는 주말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의 오지연(이승연)이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4대가 모여사는 김씨 집안 맏며느리가 된 그는, 위로는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 홀로 된 시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동생까지 모셔야 하고 아래로는 두쌍의 시동생 부부까지 챙겨야 하는 부담스런 처지다. 그러나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그것도 식구 수대로 차려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힘든 기색을 보이거나 짜증내는 법이 없다. 손아래 동서들이 “하던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니, 오지연은 “내 자아실현은 현모양처”라고 망설임없이 대답한다. 참으로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참한 맏며느리라 하겠다.

같은 시간 <맹가네 전성시대>에서는 두번 이혼하고 성이 다른 두 아이를 키우는 맹금자(채시라)가 매맞는 아내로 살았던 과거와 결별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이혼녀에게 보내는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절반은 타고난 둔감함과 낙천성으로, 절반은 오기로 버티는 중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맹금자에게, 약국은 뭐 그리 대단한 자아실현이라기보다 생계를 위한 마지막(또한 제법 든든한) 보루인 셈이다.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나 약사가 될 정도로 똑똑한 두 여성의 인생, 혹은 그 인생을 포착하고 묘사하는 방식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더구나 주말드라마는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이 사회의 ‘평균적인’ 가족의 모습과 ‘보통’ 사람들의 삶을 그리려 애쓰지 않았던가. 그런데 새벽부터 밤까지 가족을 위한 각종 서비스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이를 희생은커녕 진정한 보람이라고 자부하는 여성과 결혼으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된다면 한번이 아니라 두번도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는 서로 다른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니.

드라마 시청률을 분석한 결과(11월11일∼12월8일 TNS미디어코리아 조사)를 보면, 두 드라마 방송시간대에 <내 사랑 누굴까>를 시청한 여성 시청자는 17.6%, <맹가네 전성시대>를 시청한 여성시청자는 8.6%다. 현재 <내 사랑 누굴까>의 전체 시청률이 <맹가네 전성시대>의 두배에 달하기 때문에, 이는 별로 놀라운 결과가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두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인 30대 여성들만 따져보았을 때, <내 사랑 누굴까>(15.3%)와 <맹가네 전성시대>(12.3%)의 시청률 격차가 크지 않다는 것. 다른 연령대에서는 두배, 세배의 시청률을 보인 <내 사랑 누굴까>가 30대 여성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지지를 못 받은 반면 다른 연령대에서는 그닥 호응을 얻지 못한 <맹가네 전성시대>는 30대 여성들의 높은 관심에 힘입어 지금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형국이다.

<맹가네 전성시대>MBC 매주 토·일 저녁 7시55분

어쩌면 나이와 국적을 빼놓고는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두 여성의 공존이,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30대 여성들의 ‘혼란’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안에, 오지연과 맹금자가 함께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파파스머프 이래 가장 합리적인 가부장이라 할 시할아버지(이순재)와 그 가족들은, 여성들이 꿈꾸는 완벽한 시댁 식구들이다. 가족들은 끊임없는 가사노동과 정신적인 보살핌을 요구하는 대가로, 틈날 때마다 오지연의 지혜로움을 칭송하고 가족 안에서 그가 꼭 필요한 존재임을 되새기는 현명함을 지녔다. 가사노동이 이처럼 귀하게 대접받는 집안이라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자아실현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한편 가장의 권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보기 힘든 아버지와 공부 잘하는 맏딸을 신주단지 모시듯 살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맹금자는, 믿을 건 약사 자격증밖에 없지만 그 자격증 덕택에 자신이 원할 때 당당하게 자주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는 여성들은 “일단 결혼하면 남다른 지혜와 용기로 가족 안에서 마땅한 대접을 받고, 나아가 이상적인 가족을 결성할 수 있다”는 오지연의 주장을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어영부영 일을 그만두었다가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생존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맹금자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아닌지. 이렇게 생각하니 대학교육을 받고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한국 여성들이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형편없이 낮은 나라에 살면서 겪는 혼란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지은아, 금자야, 부디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주렴. 어느 날 오지연이 “내가 뭐가 부족해서 박사 학위 포기하고 솥뚜껑 운전이나 하고 있느냐”고 자신에게 되묻거나 맹금자가 “남들은 다들 참고 사는데, 애들 크고나면 두번이나 이혼한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을까”싶어 잠 못 이룬다면, 대체 우리는 또 어찌해야 하느냐, 말이다. 이미경/<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