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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스한 격정극 <피아니스트>와 격정의 배우 위페르
2002-12-26

슈베르트와 마조흐의 밀애

으스스한 섹슈얼 격정극 <피아니스트>(The Piano Teacher)는 슈베르트에게 바친 가슴과 마조흐도 놀랄 만한 성적 판타지로 가득한 머리를 지닌 미치광이 여인 역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의 엄청난 열연을 보여준다. 이런 배역을 가지고도 이처럼 전혀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게 연기할 수 있는 여배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역할을 기꺼이 맡아줄 여배우도 달리 또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오만함과 비참함 사이를 매끄러게 오가는 동안 눈을 젖게 만들고 자신의 꿈에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면서, 믿을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위페르는 표현의 동물스런 결여와 열정적인 내면세계의 갑작스런 경련을 한데 엮어 표현한다. 물론 이것은 계산된 연기(지난 칸영화제에서 여배우상을 받았다)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유연하고 냉소적인 소설을 특유의 가혹함으로 연주하는 미하엘 하네케는, 실질적으로 러닝타임 140분 내내 위페르를 스크린 위에 붙잡아두었다.

최고로 간단히 말해, <피아니스트>는 한때 음악신동이었던 한 여인과 괴물처럼 통제적인 그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여인은 한 침대에서 잘 정도의 상징적인 관계에 서로 묶여 있다. 그 관계는, 40줄의 딸인 에리카 코후트 교수가, 학생들을 통제할 때보다 더욱 엄혹한 방식으로 자신의 요동치는 욕망을 찍어누르게 만들 정도로 억압적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형적인 갇힌 공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온갖 폭력적 충격들의 일련 시리즈라고 할 만하다. 학교에서 레슨이 끝난 뒤 에리카가 늦게 집에 돌아오면 독재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 새 옷을 한벌 샀다고 벌어진 격렬한 언쟁은 마치 <싸이코>에서 앤서니 퍼킨스가 자기 자신과 벌이는 정신분열적 말싸움을 연상시키며 이는 곧 머리채를 잡아 휘감는 전쟁 같은 싸움으로 이어진다.

문명과 이것이 주는 불만과 권태에 대해 또 한번 주석을 다는 셈인 <피아니스트>는 클래식 음악이, 지성과 기술과 자기통제와 열정의 승화를 모두 합한, 문화의 가장 숭고한 표현이라는 발상 자체를 패러디한다고도 볼 수 있다. 에리카가 학생들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할 정도로 매섭고 혹독하게 훈계할 때 이는 영화의 이런 뚝뚝하고 불투명한 표면에 대해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꺼운 얼음 같은 인상은, 아무리 슈베르트를 갖다부어도 완화되지 않을 것 같은, 거의 아찔할 정도의 엄청난 하드코어 포르노에 의해 곧 분쇄돼버린다. 이 피아노 선생의 내면세계도 그런 것이다. 에리카는 지저분한 핍쇼장에 자주 드나들 뿐 아니라(레인코트와 장갑으로 꼼꼼히 가린다) 거기 버려진 더러운 휴지에 환희에 차서 얼굴을 파묻는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밖에서 어머니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화장실에 문 걸고 들어가서는 벌거벗은 허벅지 사이에 면도날을 섬세하게 갖다댄다. 옐리네크의 건조한 표현을 빌리자면, 에리카의 “취미”는, “자기 몸을 자르는 것이다”.

하네케는 지성에 어필하는 모더니스트 호러영화에 강하지만, <피아니스트>의 프랑스 캐스팅(반면 촬영은 빈에서 이루어졌다)은 영화와 대사 사이의 언어적 불일치를 초래하여, 독일어를 사용했더라면 온전히 드러났을 독재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가 많이 눅여졌다. 영화는 하네케의 전작 <베니의 비디오>나 <퍼니 게임>만큼 징벌에 관심있지 않다. 또 피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원작에 충실했던 카프카의 <성> 각색본처럼 절제돼 있지도 않다.

위페르는 완전히 정신나간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종종 지나치게 배우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어서 그녀의 에리카는 소설에 나타난 무시무시한 괴물의 원래 모습보다 훨씬 엄격하고 또 덜 연약해 보인다. 소설에서 에리카는 어린 구애자의 뜨거운 관심에 기꺼이 빠져든다. 영화에서는 소설에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멋진 모습으로 나온다. 그녀의 요상한 증세들은 혐오스러워도 분리시켜낼 수 없는 자기 참모습의 일부가 아니라 발터에 의해 무찔러져야 할 적수들일 따름이다. 가장 재능있는 한 학생을 매섭게 몰아세운 뒤 곧장 이루어지는 콘서트홀 여성휴게실에의 첫 번째 밀회에서 관객은 억압됐던 에로티시즘의 폭발을 볼 수 있다. 최초의 단 한번 테이크로 간 것 같은 그 장면은, 영화를 장악하려는 감독과 주인공이 서로 부딪쳐 결국 감독이 승리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열정에 들뜬 발터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그리고 그의 욕망을 밟아버리고) 나서 새로이 눈을 뜬 에리카는 앞으로도 계속 “지도”해주마고 약속한다. 발터가 에리카를 따라 집에 가서 어머니가 못 들어오게 침대방 문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을 도운 뒤에야 겨우 깨닫게 되는 이 묵직한 약속의 내용은 마르키스 드 사드의 책만큼이나 무게있고 또 마찬가지로 연기로 옮기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하네케의 포르티시모 연출방식은 옐리네크의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다 뒤덮어버릴 지경이다. 하지만 영화 속 그 어떤 것도 위페르 연기의 섬세함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그녀의 연인이 구역질나는 편지를 큰소리로 읽음에 따라 희망적 예감에 젖어가던 위페르의 그 섬세한 연기 말이다.짐 호버먼/ 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

* (<빌리지 보이스> 2002.4.2.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