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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스페셜 <별을 쏘다>
2002-12-31

까막눈 소년 성공기

천하에 집도 절도 없는 소년이 한명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까막눈이었죠. 그 곁에는,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남자에게 사기당하고, 버림받은, 서른살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미용실 점원이었습니다. 호텔 벨보이였던 소년은 배우가 되고 싶어했고, 미용실 점원 소녀는 매니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햇볕이 쨍쨍한 날, 둘은 부푼 꿈을 안고 방송사로 찾아 갔더랬습니다. 검은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니네 PR비는 있니” “그게 뭔가요” “그럼 그만 가보거라” 어리둥절해진 소년에게 소녀가 말했습니다. “처음엔 다 그런 거야. 점심이나 먹자꾸나.” 김밥으로 배를 채운 소년, 소녀는 영화사로 찾아갔습니다. “역시 배우는 영화를 해야지.” 소녀는 소년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영화사에 도착하자 이미 저녁이었습니다. 꾸울꺽, 침을 삼킨 소녀가 물었습니다. “감독님 계신가요” 손톱을 정리하던 여직원은 다정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어느 기획사 소속이시죠” “지금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생긴 소년이 꾸벅, 90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여직원은 조금 더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명함 여기 두고 가세요.” 영화사 문을 열고 나오는 소년, 소녀의 얼굴은 희망으로 발그스레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소년의 손을 꼭 쥐며 푸른색으로 빛나는 광고판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뭐라고 써 있는지 알겠니” “….” “따라 해봐, 별.을.쏘.다!”

<별을 쏘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착한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이다. 고아로 자라온 까막눈 청년 성태(조인성), 오빠와 단둘이 궁상스레 사는 서른살 초보 아줌마 소라(전도연). 이 둘은 ‘온갖 고난과 역경, 배신을 이겨내고’ 배우, 매니저로 성공하게 된다. 대본을 읽지도 못하는 배우에, PR비가 뭔지도 모르는 매니저가 말이다. 게다가 연상연하의 사랑까지. 세상에! 요즘에 이런 성공+러브 스토리가 어딨어, 하고 기가 차할 노릇이지만 너무 그렇게 열낼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5년 만에 다시 브라운관으로 돌아온 전도연의 물오른 연기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거니와, 그녀에 비하면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꽃미남, 조인성의 천연덕스러운 주책도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그 덕분인지 경쟁작인 <장희빈>의 육탄공세에 밀렸던 시청률도 차츰 올라, 이제 전체 프로그램 중 7위, 수목드라마 중에서는 단연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래도 드라마는 최소한의 ‘리얼리티’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분이 덜 풀렸을지 모른다. 몇몇 거대 기획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캐스팅, 대형 연기학원에서 배출되는 배우들, 끼워팔기에 PR비까지.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종 연예계 비리와 PR비 문제로 시끄러웠던 올해에 이런 ‘현실 왜곡’ 드라마를 내놓은 저의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PD와 작가가 왜 모르겠는가. 현실에서는 착한 소라와 성태쪽보다는 나쁜 도훈(이서진)과 예린(홍은희)쪽이 더 성공하기 쉽다는 것을. 그리고 배우들이 왜 모르겠는가. 자신들조차도 이런, 착하지만 무모한 방식으로 성공하진 않았다는 것을. 맨주먹과 열정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살벌한 정글이 되어버린 세상. 그 정글의 한가운데서 그들은 슬픈 판타지를 그려보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 더이상 산타를 믿지 않지만, 부모님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싶은 조숙한 아이처럼.

드라마 속에서 소라와 성태는 툭하면 달린다. 버스에 올라탄 소라를 뒤쫓는 성태는 택시를 잡아타지 않는다. 그저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린다. 집에 돌아오지 않는 성태를 찾아나선 소라도 차를 타지 않는다. 하얀 김을 내쉬며 밤거리를 달린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전도연, 정말 잘 달린다!). 심지어 이 무모한 커플은 남대문에서 명동까지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한다. <태양은 없다>의 홍기가 그랬듯이, <네 멋대로 해라>의 복수가 달렸듯이 말이다. 이것이 나이든 고리대금업자 같은 사회를 돌파하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달릴 수 있는 튼튼한 다리 근육만을 가지고서 말이다. 이 착한 소년, 소녀가 성공할 수 있는 그런 착한 사회, 어디 없을까

덧붙이는 말: 주제곡인 <In My Dream>은 차게 & 아스카의 곡을 번안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원곡인 <On Your Mark>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사람이 다름 아닌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천사와 그녀를 구하고자 하는 두명의 남자 이야기. 이 역시 아름답고 슬픈 판타지이다. 강추!김형진/ 자유기고가 ofotherspac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