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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풍자,<박시백의 그림세상>
2003-01-02

만화,애니

매일 신문지면에 연재되는 시사만화는 현장성을 생명으로 한다. 어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늘의 신문지면에 실리고 동일한 시간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메타포가 등장한다.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거친 목판의 선이 살아 있는 이도영의 만화에서 시작된 한국의 시사만화는 근 100여년 동안 꾸준히 신문지면을 통해 독자와 만났다. 50∼60년대, 풍자로 칼날을 벼린 시사만화는 박정희의 집권 이후 강렬한 통제에 짐짓 한켠에 비켜 서 모두를 비판하는 양비론을 주무기로 하는 시사만화로 변화하며 지루해지기도 했다. 힘빠진 시사만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작가는 박재동이다. 아직까지 박재동처럼 전투적이고도 서정적인, 직설적이면서 우화적인 만화를 보여준 작가는 많지 않은데, 아마 시대의 힘과 만화가 가장 행복하게 만났었기 때문이리라.

박재동은 <한겨레신문>에서 1칸짜리 시사만평을 담당했지만 이야기에 대한 욕구를 풀기 위해 한 페이지 정도에 해당하는 여러 형태의 만화를 ‘그림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제주도 4·3, 전교조, 환경, 여성문제 등을 다룬 이 만화는 친근한 일상성에 기반한 만화로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의 울림을 주기도 했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

박시백은 박재동이 떠난 뒤 <한겨레신문>에 ‘박시백의 그림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가 있는 시사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97년 6월부터 2001년 4월까지 44개월 동안 연재된 이 만화를 총 9개 꼭지로 분류해 정리한 책이 <박시백의 그림세상: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기획자의 고민대로 신문에 연재된 ‘시사만화’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쉽게 잊혀지는 특징이 있다. 단행본이나 잡지처럼 반복 독서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사를 다룬 만화라서 몇년이 지난 뒤에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표현도 있고, 유치하기도 하고, 지난 유행 같기도 해 단행본으로 묶어도 별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 책은 부제처럼 ‘우리 시대의 자화상’으로 새롭게 2003년을 바라보는 오늘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첫 번째 꼭지인 ‘Oh Your America’에 묶인 18편의 만화는 광화문을 환하게 밝히는 촛불들과 오버랩되는 오늘의 문제다.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이 지금까지 어떤 범죄를 저질렀으며,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만함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지금까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통일에 대한 만화, 청산되지 않는 역사에 대한 만화, 우리나라의 왜곡된 정치구조에 대한 만화 등 박시백이 그려내는 자화상은 그대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소박함의 만화

박시백은 우리의 일상이 부정, 부패, 불의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화를 읽어나가다보면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사회는 거대한 벽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벽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박시백은 큰소리로 비판하지 않는다. 신문의 힘을 빌려 자신의 반대자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지도 않는다. 묘한 양비론으로 결국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수십년 동안 재생산되어온 거대한 주류의 힘에 기대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분노와 좌절과 웃음과 희망을 담아낸다. 박시백 만화는 내 일상과 함께 하며, 내 일상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시백은 꽤 전투적으로 조·중·동의 문제를 공격하는데, 이들 만화 중에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 2001년 2월14일에 수록된 ‘최강’이라는 작품에는 한국에 최강은 장관, 검찰, 국회의원, 대통령도 아닌 족벌언론이라고 이야기하며, 족벌언론에 맞장을 뜨는 ‘너무 예외적인 경우’이며 ‘용기 하난 짱’인 ‘노무현’을 소개한다. 그 노무현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즐거운 일이고 진보의 소중한 발걸음이다.

내가 박시백 만화에 반한 지점은 소박함에 있다. 2000년 7월3일치에 실린 ‘집자랑’이라는 만화를 보면, 24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 아내가 친구들한테 자랑삼아 전화를 거는 장면이 나온다. 이 모습을 본 남편은 땀을 흘리며 그만 하라고 권하고, 그래도 아내는 자랑하기 위해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아내는 3억원짜리 전세를 사는 친구 때문에 당황하고 전화를 끊는다. 당혹스러운 남편과 아내의 얼굴. 나는 여기서 소박한 우리의 모습을 읽는다. 그런데 책 1권으로 묶이는 과정에서 이런 소박한 만화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아쉽다. 박재동 만화와 구분되는 박시백 만화의 특징은 표현이나 소재의 소박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박시백이 공식적으로 데뷔한 작품이 1994년 제2회 신한새싹만화공모전에서 동상을 수상한 <밍구의 그늘>일 것이다. 왕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만화를 보면 오늘 <박시백의 그림세상>이 보인다. 소외받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만화들이 소록하게 숨어 있는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이제 겨울방학을 맞이할 학생들에게 권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