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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적으로 본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2]
2003-01-02

페미니즘 `퍼니 게임`

그녀는 거부한다, 항거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에리카는 대타자로서의 위치를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마조히즘적인 위치를 고수하려 든다. 그러니까 상징계에서 작동하는, 아버지의 법에서 부과하는, 누군가의 대타자가 되는 여자를 거부하고 실재계에서 올라온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려 드는 것이다. 비극은 시작된다. 그녀는 클레메라는 아이를 품에 안고 거울에 그를 반사시키는 위치, 사회가 부여하고 있는 멜로 장르의 연상의 여인의 역할을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그것은 에리카 안에 가득 찬 나르시시즘에 쌓여 있는 죽음의 충동, 자신 안에 있는 해골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실 상징계에서 남근처럼 보였던 피아노 치는 여자의 위치는 가짜 주체, 에리카의 어머니가 설정해놓은 타인의 자리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남근의 위치에서 해골의 위치로. 그것은 에리카의 어머니가 그토록 금지한 밑바닥 없는 추락의 늪으로 향한다. 그것은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비명에서 속삭임으로 가는 것이지 큰소리에서 작은 소리로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기표 속의 텅 빈 구멍이 된 그녀, 남자의 성기를 보고 토하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에리카를 직시한 클레메는 돌연 “이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그녀의 육체에 강간과 폭력을 자행한다. 클레메는 에리카의 마조히즘이 사실은 그녀를 둘러싼 지독한 억압에 대항하는 유일한 항거, 자신을 망가뜨림으로써 벌이는 특단의 복수 혹은 스스로의 충동에 대한 극단적인 우울과 애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때 이자벨 위페르의 육체는 몸으로 웅변한다. 클레메에게 맞아서 코피가 터진 자국, 그것을 닦다 피범벅이 된 낡은 잠옷과 젖가슴이 드러나는 그녀의 육체는 증거한다. 남성의 판타지가 거두어진 여성의 육체의 적나라함이란 이런 것이라고. 사실 클레메가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그가 그토록 ‘함께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던 행위, 사랑이란 이름 아래의 이성애의 행위는 여성의 육체, 여성의 질에 대한 관통의 욕망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진다. <피아니스트>가 재현하는 섹스는 가부장제가 고안해낸 모든 달콤한 솜사탕을 거두고 여자의 육체를 직시하게 만든다. 에리카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성애의 투사가 거두어진 그녀의 피흘리는 얼굴은 참혹하지만 카트린 브레야의 <팻 걸>의 마지막이 그러하듯 정직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클레메의 강간은 여성의 판타지를 실현하는 대상화된 위치를 거부하는 클레메의 분노의 몸짓으로 보여진다. 원작의 덕택으로 <피아니스트>는 엘렌느 식스가 주장한 남근 중심의 이야기, 남성의 법률 앞에서 상연되어지는 남근적 내러티브에 대한 유혹에 차갑게 손을 뗀다. 분명한 것은 에리카가 클레메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마조히즘의 섹스와, 클레메가 실행한 마조히즘의 섹스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에리카의 욕망은 상징계의 그물로는 도저히 포섭이 안 되는 비천한 것 (크리스테바의 말대로)이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욕망이 현실의 표면에 떠올랐을 때 클레메가 그것을 현실과 혼동하는 것도 당연하다. 심연에서 나온 그녀의 욕망, 언어 이전의 욕망, 심지어 어머니의 외부에 존재하기 전에 이미 모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서투르지만 폭력적인 단절의 욕망, 사실은 클레메에게 전이된 에리카의 욕망(이제부턴 네가 나한테 명령해!), 무엇보다도 여성의 욕망을, 가부장제의 주체로 작동하는 그가 이해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히스테릭한 페미니즘 '퍼니 게임'

그런데 바로 당신이 미하엘 하네케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지금 빈에서 활동하면서 드라이한 문체와 만드는 작품마다 떠들썩한 논쟁을 일으키는 엘프리데 옐리네크라고 하는 좌파 페미니스트의 작품을 영화화하려 하고 있다. 이제까지 위에 열거한 모든 것은 텍스트 분석으로 하네케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옐리네크의 예술 자본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사도마조히즘을 빌려 이야기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직설법이 평소 관객에게 고문에 가까운 퍼니 게임을 자행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맨살을 까발리는 자신의 의도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영화적으로’그녀의 심연을 창조할 것인가 미하엘 하네케의 이 히스테리 <피아니스트>에 대한 퍼니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텍스트가 아닌 영화로서의 <피아니스트>는 기실 ‘문의 영화’라고 지칭할 만할 것이다. <피아니스트>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장장 스무번 이상 문을 열고 닫는다. 가만히 보면 내러티브의 전개에 별 필요가 없는 것 같은 이 장면은 그러나 빈 음악당을 나오는 위페르를 영화 끝까지 쫓아다닌다. 그녀가 아파트의 문을 열 때 그녀는 어머니의 딸, 에리카로 돌변한다. 그녀가 다시 빈 음악당의 문을 열 때 그녀는 교수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또 다른 얼음덩어리 에리카의 출현이다. 그리고 마침내 포르노 가게의 문을 열고 유령처럼 그곳을 미끄러져 들어갈 때 비로소 그녀는 그냥 포르노 보는 여자 에리카가 된다. 이자벨 위페르의 ‘눈과 불’의 연기에 힘입어 영화 <피아니스트>의 ‘문’은 겹겹이 쌓여 있는 욕망의 낮과 밤의 두께, 때마다 달라지는 그녀의 의식과 무의식에 가교를 잇는다. 이때 슈베르트의 음악은 관객에게 감성을 끌어내는 배경이 아니라 에리카가 휘두르는 파워처럼 혹은 욕망의 내밀한 결을 감싸는 포장처럼 단락단락 접혀졌다 펴진다(하네케는 인물들을 잡을 때도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투숏이 아니라, 한 사람이 화면을 등지고 다른 한 사람이 화면에 얼굴을 들이미는 오버 더 숄더 숏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네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이야기, 지배와 소유에 대한 이야기, 이 속에서 사랑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특히 슈베르트의 3중주가 흐르며 에리카가 포르노 가게로 들어설 때, 문을 밀며 들어가는 그녀를 수평 트래킹으로 따라가는 카메라는 클래식과 포르노의 몽타주라는 낯선 세계로 관객을 이끌 것이다.

그녀는 결국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생을 마감했다. 이 질문에 대해 에리카 역시 쓰윽 어깨에 칼을 꽂으며 대답한다. 다 쥐어짜서 남는 마지막 한 방울이 바로 음악이라고. 빈 음악당의 문, 그 세겹의 문을 힘겹게 열고 나오는 그녀는 이미 목적지를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다시 집으로. 눈이여 내 눈물을 따라가라.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의 ‘홍수’의 한 구절, 이하 원전 인용) 조금씩 고이면서 피는 계속 흐른다. 피는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른다.심영섭/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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