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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복고영화 <품행제로>가 유쾌한 이유
2003-01-09

복고는 전진중?

2002년을 이틀 남긴 저녁,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무척 즐겁고 유쾌했다. 그 유쾌함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함께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에게서 어떤 공감의 기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관을 나서던 중, 뒤에서 들려오던 한 마디. “야, 정말 황당하다!”그런데 얼른 뒤돌아본 그 20대 청년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씁쓸한 냉소가 아니라 흔쾌한 긍정의 미소. 그 미소를 이끌어낸 영화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20년 가까운 세월의 차이가 있는 그와 나를 동시에 미소짓게 했던 힘. 2002년 한국영화에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청춘영화가 유난히 많았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 <묻지마 패밀리: ‘내 나이키’, ‘교회 누나’> <남자 태어나다> <몽정기>…. <품행제로>는 분명 이 복고의 흐름 속에 있는 영화이고, 그 영화들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것 또한 갖추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고 미덕이다.

적절한 곳에, 적절히 자리잡은 복고

돌이켜보면 이 이상한 ‘복고 붐’의 징조는 이미 2001년에 나타났다.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2001년에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비장하고 아련한 슬픔이 있었다. 그런데 2002년에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에는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집요한 웃음의 추구가 있다. 왜 그럴까 무척 궁금해진다. 물론 이야기를 풀어내는 감독들의 세대차이()가 그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미진한 느낌이 든다(그들은 넓게 보면 모두 ‘386세대’에 속한다. 우리 80년대의 격변은 같은 세대조차 둘로 나눌 만큼 그렇게 크고 깊은 것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2년 영화의 흐름을 지배한 웃음과 재미의 추구는 그들(감독)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관객) 모두의 것이라는 점이다. (상업)영화 감독들(특히 그 대부분을 만든 데뷔 감독들)의 간(肝)은 관객의 취향을 무시할 만큼 그렇게 크지 못한 법이다. 그렇다면 그 강박적 웃음 추구에 대한 추궁은 부메랑이 되어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셈이다. 그러고보면, 2002년 ‘코믹 복고’의 열풍은 2001년 시작된 ‘복고 전통’과 ‘웃음과 재미’에 대한 우리 자신의 취향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현상인 셈이다. 어쨌든 그 흐름의 마지막 자리를, <품행제로>처럼 품이 넓고 속이 깊은 영화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반갑고 기쁜 일이다.

영화 속 시간은 30년을 넘나든다. 이야기의 배경은 80년대이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문체는 30년의 시간을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소림축구>와 <매트릭스>를 연상케 하는 신화 속 두 영웅(중필과 상만)의 다분히 현재적인 과장법. 그런데 중필은 ‘이소룡’의 몸동작으로 액션을 마무리하고 <황야의 무법자>의 음악과 함께 석양 속으로 사라져간다. 이 시대를 넘나드는 ‘기억의 혼성’은 이미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 보인 특징이다(이대근의 <대부> 콜레오네 코믹 버전, 70년대 가련한 여인의 대명사인 <별들의 고향>의 경아, <첫사랑>과 <달과 꼭지>의 문체를 차용한 ‘환상’ 연출…). 그 기억의 혼성은 세대를 뛰어넘는 ‘영화적 기억’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렇듯이 영화적이고 문화적인 코드를 통해 과거를 불러내고 있다. 그 폭넓고 풍성한 과거의 영화적 이미지들은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유쾌한 것들이다. <품행제로>에는 그 이미지들이 적절한 곳에, 적절한 리듬으로, 전체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어서 더욱더 반가웠다.

복고청소년물에서 쿨한 성장영화로

이 영화의 사랑 이야기에는 쉽게 풀기 어려운 난제가 하나 있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사랑이 계층 내의 것이었다면 <품행제로>에서 중필과 민희에게는 계층의 벽이 있는 것이다(그 계층성이란 단지 집안의 경제적 형편의 차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범생과 불량학생. 불행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는 학생의 집안 경제적 형편과 성적 분포 사이에 대체적인 비례관계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품행이 방정해도 성적이 좋지 못하면 모범생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게다가 그 계층성은 세대를 건너 재생산되는 양상마저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품행제로>에 설정된 ‘민희-중필-나영’ 사이의 삼각관계에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멜로드라마의 공식이 청소년 버전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 속에서 보여준 오공주파 두목 나영의 가슴 짠한 헌신은 이 멜로적 분위기를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

청소년영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멜로적 설정은 어찌 보면 위험한 것이고 부담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낭만적 봉합과 냉정한 갈라놓기, 이 둘 사이의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이다. 자칫하면 안이한 낭만주의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친 냉정함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다. 감독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이 덫을 비교적 슬기롭고 정직하게 헤쳐나간다. 민희와 중필의 첫 키스는 감미로운 ‘종소리’가 들릴 만큼 귀엽고 깜찍하다. 하지만 민희의 원조 ‘나이키’ 신발과 중필의 사이비 ‘나이스’ 신발 사이의 거리는 엄연한 현실이다(이 ‘나이키’ 설화는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에서 아름다우면서도 눈물겨운 동화로 나타난 적이 있다. 그 진품 설화는 왜 이리 자꾸 귀환하는 것일까 지금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차이일지 몰라도, 그 시절 진짜와 가짜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그만큼 절박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감독은 이러한 대조법을 통해 순수한 사랑의 낭만성과 현실의 냉혹함을 동시에 복선으로 깔아놓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덧붙여진 ‘그 이후’의 짧은 몽타주를 통해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영화는 가볍고 낭만적인 ‘복고 청소년물’에서 제법 진지한 성장영화로 거듭난다(이러한 방식은 올해 개봉했던 멕시코영화 <이투마마>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기도 하다). 민희의 연주회에 가는 대신 결연하게 결투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중필. 그 결투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순수와 낭만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냉엄한 현실로 진입하기. 카메라는 그 순간 신화화된 낭만성의 때깔을 벗어던지고 냉정하고 묵묵하게 중필의 절규(성장통)를 잡아낸다. 그리고 그 순간은 잠시 외도했던 배우 류승범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돌아온 류승범, 이것이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한동안 TV 브라운관에서 ‘고독’하게 보였던 류승범(드라마 <고독>에서의 그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불편하고 고독해 보였다). 그는 이 영화 속에서 ‘화려한 귀가’를 한다. 누군가 말했다. “이 영화 류승범한테 맞추어서 짠 각본 아냐”

80년대, 그러나 최루탄 없는 노스탤지어

분명 <품행제로>는 올 한해 동안 두드러졌던 ‘8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기대고 있는 영화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80년대를 소환하되 최루탄이 난무했던 ‘거리의 기억’을 애써 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회피의 방식으로 순진하고 철없던 청소년 시절의 ‘골방 기억’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영화들과 공통점을 갖는다. 한국영화의 90년대에는 한국 현대사의 외상적 순간에 대한 ‘집단의 기억’을 진지하게 소환하고 반추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었다. <남부군>(정지영, 1990), <하얀 전쟁>(정지영, 1992), <그 섬에 가고 싶다>(박광수, 1993), <태백산맥>(임권택, 1994),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1995), <꽃잎>(장선우, 1996),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1998)…. 그러한 영화적 시도들은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마지막으로 대가 끊긴 듯하다. 대신 그 빈자리를 한결같이 이러한 기억방식들이 메우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문제적이고 징후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기억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심한 편중에 왠지 모를 허기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거듭 반복되는 그 시도들 속에서 한국영화가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품행제로>는 앞서나온 ‘그 영화들’을 반복하면서도 착실하게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장르의 진화’라 칭할 수도 있을 그러한 한 걸음을 말이다. 내용(주제)적으로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다”라고 하는 낭만성에 머물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형식(스타일)에 대한 자기반영적 고민의 흔적도 역력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와 ‘반전되는 시각적 스타일’은 그런 고민의 흔적일 것이다. 세명의 극중 내레이터가 전하는 두 영웅의 신화(소문)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다소 코믹한 변형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액션은 많은 영웅 설화들 속의 그들처럼 그야말로 ‘하늘을 날고 땅을 가르는’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실제 결투는 처절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들의 액션은 서툴기 그지없고 반칙도 불사할 만큼 그렇게 비루하다. 카메라는 그 현실 속의 싸움을 수식없이 냉정하게 잡아낸다. 영웅(중필)은 악(상만)을 물리치지만 그는 결코 환상 속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드넓은 평원으로 사라지지도 않고 여자를 얻어 가정을 이루지도 않는다. 중필의 처절한 승리의 절규와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나고, 시간을 건너뛴 뒤 밝혀지는 소문 속의 그들의 현재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나 짧고 경쾌한 몽타주가 전하는 그 냉엄한 현실은 필요 이상으로 무겁지도 않다.

혹시 이 영화가 복원해낸 가장 80년대적인 모습은 바로 이 ‘신화(소문)와 현실(사실)’ 사이의 그 거리이지는 않을까 그랬다. 우리의 80년대에는 아직도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무수한 소문들이 있다. 그중에는 1982~83년 무렵 훈련 중인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여중생 강간사건에 관한 것도 있었다. 나는 광화문을 뒤덮은 촛불의 행렬을 보면 자꾸 그 소문의 진상이 궁금해지곤 한다.변성찬/ 영화평론가 ibs04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