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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든 황혼의 전사
2001-04-24

<역사수업> 감독 바버라 해머

“엄마는 날 셜리 템플처럼 키우고 싶어했죠.”

반백의 짧은 머리와 가벼운 검은 옷차림의 바버라 해머는, 그러나 지금 어디 한 구석도 셜리 템플 같지 않다. 예순두살, 레즈비언으로서 영화를

도구삼아 레즈비언의 역사를 써온 그는, 재롱으로 웃음을 버는 여자아이의 저 반대편, 대중 앞에 자신의 문화를 전하는 지적이고 실험적인 감독으로

일생을 살아왔다.

그를 서울로 부른 것은

<역사수업>이라는 그의 지난해 작품. 서울여성영화제 상영작인 <역사수업>은 레즈비언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 자료를 모아

만든 몽타주 작품으로, <질산염 키스> <바비의 일생>에 이어 그가 만든 레즈비언-게이 역사 다큐멘터리 3부작의 완결편이다.

몽타주를 택한 이유? 그는 “레즈비언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역사다.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 몽타주는 완벽한 기술이다.

그것은 퀼트와도 같다”라고 말한다. <역사수업>은 그러나 퀼트처럼 곱게곱게 이어붙인 작품은 아니다. 가부장적 시선으로 레즈비언을

대상화한 옛 의학용, 혹은 홍보용 필름을 재료로 한 만큼 공격적인 전술로서의 유머를 섞어 꿰맸다. 이 다큐멘터리 작품을 보면서 관객은,

레즈비언을 존중하지 않는 자들의 시선을 매우 자연스럽게 ‘내려다’볼 수 있다.

“1978년, 파리에 갔을 때 나는 그곳 여성영화제에서

아녜스 바르다를 만났어요. 어떻게 하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나 졸졸 쫓아다니며 물었죠. 바르다는 그때 내게 ‘가서 영화나 만들어라’라고

말했습니다." ‘겨우’ 여섯편 정도밖에 작품을 만들지 않았던 신참 때 그렇게 처음 보았던 바르다를, 해머는 이번에 영화제 리셉션에서

그때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며 웃음을 짓는다. 이번에는 바르다가 먼저 아는 체를 했고, 어느새 훌쩍 레즈비언-게이영화의 대명사처럼 돼버린

그를 바르다는 힘있게 포옹해주었다고. 1939년 우크라이나 이민가정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태어난 바버라 해머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눈떠가면서

이민자의 일원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사회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봐갔다. 이후 UCLA에서 심리학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영문학과 영화학,

디지털 미디어를 공부한 그는 30대 초반에 처음 실험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커밍아웃을 한 것도 그무렵이다. 한 여성해방운동 집단의

학생들과 토론을 벌인 뒤, 그는 ‘벽장’에서 나와 커밍아웃을 했다. 실존인물인 세명의 여성예술가에 대한 한 시간짜리 비디오작품 <여성의

벽장>에서 해머는, 그 자신은 이미 박차고 나온 바로 그 ‘벽장’에 대해 고찰한다.

bjhammer@aol.com

해머를 ‘후원’하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나 이 주소로 메일을 보내면 된다. 그는 지금 두개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한국 여성들에 관한 것이다. “이제는 역사가 돼버린, 전통적인 방식으로 강인하게 살아온 한국의 여성들”에 관한 작품을 위해 조사를

할 예정이라고.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중인 것으로, 2차대전중 프로방스 지방의 여자 레지스탕스들에 대한 작품이다. “살인과 테러의

시기에 과연 사람은 화가로서 의사로서 교사로서 일상생활을 해야 할까, 아니면 싸워야 할까”를 묻는다. 서울에 머무른 며칠 동안 남산 등산을

하며 쑥을 캐는 우리나라의 또래 여인네들을 인상깊게 봤다는 해머는 인터뷰 다음날 제주도로 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여성영화제의 <역사수업>에

이어 얼마 뒤 전주영화제에서는 일본 오가와 프로덕션을 비판한 그의 또다른 작품 <헌정>을 상영한다.

글 최수임 기자

사진 이혜정 기자